(조선일보 2018.02.20 김기철 논설위원)
20년 전쯤 서울 정동극장에서 본 연극 '오구'는 충격적이었다.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굿판을 벌이고 있는데 실제로 노모(老母)가 쓰러져 초상집이 되고 만 소동을 그린 작품이었다.
무속음악과 춤, 전래민요가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만담식 사설과 우스갯소리로 줄거리를 이어 갔다.
'문화게릴라' 이윤택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윤택은 이듬해 올린 신작 '느낌, 극락 같은'으로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는 극작가 이강백의 철학적 메시지 가득한 이 작품을 불상(佛像) 역 코러스 12명의 절도 있는 연기로 풀어냈다.
배우들의 동작은 일사불란했고 에너지가 넘쳤다. 연습량과 규율이 만만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배우들 연기가 강렬했다. 단원들은 집단합숙까지 하며 연극에 몰두한다고 했다.
▶"그 친구, 요즘은 단원들 안 때리나 몰라?" 그즈음 한 중견 연출가가 넌지시 말했다.
뺨을 맞아 고막이 터진 단원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참이었다.
'난닝구' 차림으로 양말을 벗은 채 연습하면서 피곤하면 단원에게 '안마'를 시킨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땐 그저 군기(軍紀)가 세긴 센 극단인가보다 했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연출가 이윤택이 어제 "제 죄에 대해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사과했다.
그는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더러운 욕망을 억제 못 해 생긴 일"이라고 했다.
이윤택이 이끌어온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이날 "오늘부로 극단을 해체한다"고 밝혔다.
서른넷 이윤택이 '서구 일변도 모더니즘극 지양' '전통문화의 재창조'를 내걸고 1986년 부산에서 만든 연희단거리패는
이날로 문을 닫았다.
▶원로 시인에 뒤이은 유명 연출가의 성추행 파문으로 예술계 안팎이 뒤숭숭하다.
이윤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 여러 여성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점에서
'미투'(Me too)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와인스틴의 경우에 가장 근접하다.
성추행을 목격한 단원들이 많았지만
"최고의 연극 집단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 모른 체하며 지냈다"는
피해자 폭로는 음습한 '문화 권력'의 악마성을 짐작하게 한다.
몹쓸 짓을 당하며 "무섭고 떨려 온몸이 굳었다"면서도
보복이나 불이익이 두려워 입을 못 연 사람들이 이 경우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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