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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협상, 야당·미국과 함께 가야

바람아님 2018. 2. 26. 10:25
[중앙선데이] 2018.02.25 01:00
 
김진국 칼럼
포석에 실패하면 바둑은 끝이 난다. 아마추어야 접바둑도 두지만, 프로 기사끼리는 포석 실수 한 점이 치명적이다. 내내 쫓겨 다니거나, 실수를 만회하려고 무리수를 두다 돌을 던지게 된다. 하물며 하수(下手)가 포석을 그르치면 더 볼 것도 없다. 판세를 못 읽으니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내내 시달리며 상수의 놀림감이 된다. 그런 꼴을 피하려면 상수가 착수하기 전에 열심히 포석해둬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전두환 정부 때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뿐 아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가 외교력을 발휘하려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취임하기 전부터 떠안은 외환위기,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모두 미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는 미국에 갈 때마다 한국 전문가들을 초청해 도움을 청하고, 의견을 들었다. 사실 미국에 한국 전문가라고 할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들을 통해 미국과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98년 6월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고 나는 보조하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2001년 3월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디스맨’(this man)이라는 말을 들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매우 불쾌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부시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만 할 수 있는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반미(反美)면 어떤가”라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그렇지만 취임하자마자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홍구 전 총리에게 주미 대사를 맡겼다. 그의 첫마디가 “나는 미국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였다고 이 전 총리는 기억한다. 그래서 보수 인사를 주미대사로 임명했다. 외교는 여야, 보수와 진보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방남(訪南)으로 시끄럽다. 남북 협상이라면 모를까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 그가 대표로 참석하는 것은 필자도 몹시 불편하다. 더 답답한 것은 이 정부의 접근 방식이다. 일방적으로 던져놓고 반대하면 벌떼처럼 공격한다. 야당과 운동권의 DNA다. 일을 잘 성사시키려는 책임감보다 선악(善惡)의 잣대가 앞선다. ‘나는 언제나 옳다. 그런 내 의견을 반대하는 것은 악(惡)이다.’
 
김영철은 서훈 국정원장의 카운터파트다. 남북 협상의 책임자다. 싫건 좋건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굳이 평창인지는 의문이다. 협상을 위해서라면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서 원장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측과 만나기 위해선가. 평창에서 고위급 북미 접촉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김여정이 왔을 때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면담 약속을 파기했다. 이런 마당에 김영철을 보내는 것은 다른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은 원칙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도 할 수 있다. 대통령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면 상대는 끝없이 양보를 요구하게 된다. 또 양보하지 않으면 대통령을 원망하게 된다. 김영철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궁색하다. 김영철이 천안함 폭침의 주범이 아니라서 받아들인다는 건지, 주범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다.
 
물론 야당이 잘한다는 건 아니다. 유족들의 분노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책임 있는 제1야당이 저렇게까지 폭언을 하며 반발할 일인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6·25의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도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필요할 때는 그것을 접어둘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랬다. 외교는 현실이다. 감정에 매달릴 일은 아니다. 북한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 같아 더 한심하고, 걱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주변국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운전석은 앉고 싶다고 앉는 게 아니다. 미국과 야당뿐 아니라 북한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김영철이 적절하지 않다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은 깡패다. 더구나 김정은은 ‘미친놈 전략’까지 쓰고 있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말이 통하고, 합리적인 우리 국민이나 우방국의 이해와 양보만 요구하면 상황을 주도할 수 없다. 인질범에게 몸값을 주는 것은 국제적인 금기인 것과 같은 이유다.
 
평창에서 보인 정부 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상하다. 북한 대표단을 과잉 접대했다면 미·일은 홀대에 가깝다. 주요국 국가원수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공개적으로 면박을 줬다. 한·미·일 공조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다. 그런데 한미 군사훈련 관련 언급에 문 대통령은 “왜 내정 간섭하느냐”고 묵살했다. 그 말보다 그것을 대변인이 공식 브리핑까지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외교를 국내용으로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포석이다. 적어도 대북 정책은 야당과 상당한 공감대를 확보해야 한다. 미리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일치된 의견을 만들지 못하면 반대 목소리라도 낮출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관성이 유지되고, 협상력도 생긴다. 미국과 공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북한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5년짜리 한국 대통령의 약속이 아니라 미국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도 23일 이방카에게 “우리 함께 갑시다”라고 하지 않았나.
 
한국갤럽 여론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여자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 찬반 여론이 역전했다. 20대의 긍정 평가도 28%에서 51%로 늘었다고 한다.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항상 뒷북만 칠까. 미리 설명하고, 설득할 수는 없을까. 공론조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