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고구려 고분벽화는 축제의 장, 1500년 지나도 생기 발랄

바람아님 2018. 4. 8. 08:19

[중앙선데이] 입력 2018.04.07 01:11


[드로잉 한국고대미술] 벽화로 남긴 유토피아
진파리 고분벽화의 소나무, 종이에 연필과 수채.

진파리 고분벽화의 소나무, 종이에 연필과 수채.


지금도 내가 아끼는 학생시절 작품이 한 점 있다. 나무를 그린 작은 유화다. 독일 베를린예술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예술학 박사과정을 막 시작했을 때 큰 아이가 생겼다. 나는 태교를 한답시고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앞에 있던 조그마한 작업실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20년도 휠씬 더 지났는데 이 그림은 왠지 한 번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모든 나무가 다 다른 모습을 하고, 모든 가지가 다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가지들이 연결되면서 만들어 내는 형상 가능성이 무한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공간은 중심과 사방, 위와 아래가 모두 포함되는 영역이다. 생명나무니 우주목이니 불꽃나무니 신단수니 우리가 신화와 전설에서 만나게 되는 나무에 대한 찬사는 애니미즘뿐 아니라 미학적 반응이기도 하다.
 
사진은 위 그림 원본 벽화

사진은 위 그림 원본 벽화

 
금동투조의 문양을 연구하다가 나는 고구려의 고분에서 비슷한 형상을 상당수 발견했다. 기둥 위로, 천장 위로, 벽화 위로 그려져 있는 문양들은 화초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다. 싹이 돋아나는 나무 가지들처럼 보이며, 서로 부딪혔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용꼬리로 보이다가 봉황의 얼굴처럼 되었다가, 새의 날개가 되었다가, 인동초가 되기도 한다.
 
문양들을 나는 종이에 간단히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눈으로만 보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종이에 드로잉하면서 대상을 관찰하면 좋은 점이 있다.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면서 호흡이 편안해지고 눈으로만 보아서는 모르던 것을 손이 알게 해 준다. 숨어 있는 이미지의 발견뿐 아니라 그리던 당시의 제작자 심리까지 엿볼 수 있다.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선과 형태와 색채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므로 즐거움이 생긴다. 즐거움이 생기므로 대상을 더 오래, 더 자세히, 매번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아래 그림의 원본 벽화

아래 그림의 원본 벽화

수산리 고분벽화의 인물들, 종이에 펜과 수채 및 콜라주.

수산리 고분벽화의 인물들, 종이에 펜과 수채 및 콜라주.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고 또 매우 다양했다. 그중 나를 가장 압도한 장면은 평양 진파리 1호분 현실 북벽의 소나무 한 그루였다. 솔거의 전설을 배웠지만 그림으로 남아 있지 않으니, 1500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일본군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 소나무 그림이 얼마나 귀중한 자료인가. 고구려 고흘 장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로 30m, 높이 5m의 이 널찍한 고분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가 원래 주인공이지만 배경에 서 있는 이 소나무 한 그루는 섬세한 가지마다 떨리는 필치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그 옆에 구름무늬와 인동무늬가 꽃비처럼 흩날린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듯한 이 그림은 김정희의 ‘세한도’와는 또 다른 축의 중요한 수목도이다. 기운생동으로 가득 찬 고대의 정신세계가 느껴진다.
 
진파리 고분벽화 다음으로 내가 즐겁게 감상했던 장면들은 수산리 고분벽화다. 얼핏 보아도 재미있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긴 장대 같은 다리 위에 올라선 사람, 그 옆에서 공으로 곡예를 부리는 사람, 멋진 콧수염에 관모를 쓰고 하인이 받쳐 주는 양산 아래에 서 있는 남자, 주름마다 약간 색을 달리하고 멋진 절개선을 가진 옷을 입은 여인, 두 손을 가지런히 소매 속으로 넣고 양쪽에 머리카락을 귀엽게 말아 놓은 어린 하녀들, 태양문양이 있는 멋진 북 위로도 양산이 있고 그 북을 매고 사람들이 행진한다. 양산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장식 드리개가 매달려 있으며 그 옆으로 화초인 듯 구름인 듯 형상들이 보이고 기다란 각배 같은 또 다른 악기의 끝에도 날개 달린 물고기 형상의 드리개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멋진 양산, 주름치마, 음악소리와 바람소리가 한자리에서 퍼진다. 삼각형 문양들과 연속무늬들이 기둥과 천장을 장식하고 그 위로 두 줄의 사선 구조가 지붕처럼 올려져 있다.
 
덕흥리 고분벽화의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사납다기보다 사랑스러운 동작의 말들 위로 돌아서서 활을 쏘는 무사들, 말을 타고 달리면서 기다란 뿔 악기를 연주하고 흔들이 작은 북을 연주하는 기수들, 불꽃처럼 보이는 산 모양 사이로 날아다니듯 달리는 무사들, 세련된 주름치마에 끝이 뾰족한 신을 신고 있는 여인들, 날개 달린 물고기, 인면조(人面鳥), 그야말로 산천이 진동하듯 기개로 가득 찬 장면이다.
 
다른 한쪽에는 귀여운 눈망울의 소, 소년들이 끄는 우차, 우차 뒤로 커다란 양산을 받쳐 들고 있는 하인,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와 그 옆에 서 있는 여인, 휘몰아치는 구름 들 위로는 별자리가 보인다. 각저총의 나무들도 금방이라도 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려는 듯 모든 지점에서 힘이 넘쳐흐른다. 나무의 생명력,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가지들마다 방향이 다르고 가지들의 수 또한 풍성하다.
 
그 외에도 안악 1호분, 안악 3호분, 무용총, 개마총, 내리 1호분, 요동성총, 환문총, 감신총, 삼실총, 약수리, 우현리, 용강대총, 안성동대총, 통구12호, 쌍영총 등 내가 신나게 바라보고 윤곽선을 따라 그려 보았던 고구려 고분벽화 장면들은 수도 없이 많다. 불꽃문양이 있는 들판, 별자리가 보이는 하늘, 구름과 화초와 바람이 뒤섞여 버리는 세계, 신비한 기둥들과 싹을 돋는 나무들 사이로 진귀한 동물들이 뛰놀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이런 곳에 갈 수 있다면, 아니 살아서 이런 곳을 상상할 수 있고 그릴 수 있다니. 1500년이 지나서 나 같은 사람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그 표현능력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남긴 유토피아이며, 유쾌하고 활력이 넘쳐나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부동(不動)의 이집트 벽화와 대척점에 서 있다. 이생과 축제의 기쁨이 저 하늘 세계에도 그대로 이어질 듯 기세가 등등하다.
 
김혜련 화가·예술학 박사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미술이론 석사를 받았다. 베를린예술대에서 회화실기로 학사 및 석사를, 베를린 공대 예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현재 베를린과 파주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