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6.24. 01:01
이때 한 서역 지역의 왕이 “바실라(신라)는 파라다이스처럼 아름다운 곳이며,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며 추천 편지와 함께 신라로 가는 뱃길을 알려줬죠.
이란에 전해져 내려온 중세 서사시 『쿠쉬나메』의 주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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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쉬나메』와 『삼국유사』의 만남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항)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절을 세우도록 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기이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삼국유사』-「기이」)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용은 헌강왕 때 뱃길을 따라 울산항에 들어온 외국인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처용무(處容舞)와 역사 기록을 보면 처용은 얼굴이 검고 눈이 깊으며 코는 매부리코로 오래전부터 서역인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 시기는 당나라 황소의 난(875~884)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특히 879년엔 황소가 이끄는 반란군이 최대 무역도시 광저우를 점령해 약탈과 살육을 벌였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광저우에서 10만 명의 외국인이 살해됐는데 이곳에 집단 공동체를 형성한 아랍-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대거 희생됐다고 합니다.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 일행이 신라로 피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사실 페르시아의 멸망과 황소의 난은 시간대가 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해 항쟁을 지휘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쿠쉬나메』가 12세기에 완성되다 보니 여러 시기에 걸쳐 벌어진 사건들이 압축돼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왕자를 따라 망명한 일행이라면 페르시아에서 지도층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왕은 (처용에게) 예쁜 여성을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고 하는데 급간은 신라에서 성골·진골 다음으로 높은 계급인 6두품만이 받을 수 있는 관직입니다.
처용은 훗날 서라벌에 전염병을 퍼뜨린 ‘역신’ 처치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아마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중앙아시아의 의학지식 덕분으로 보입니다.
이래저래 처용의 신분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 왕실의 후예였던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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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설화에 담긴 유이민 스토리
사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전부터 다양한 무리가 끊임없이 유입됐습니다. 한반도 토착민들은 새로운 기술을 갖춘 유이민들과 협력해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신라에서 3개 성씨가 번갈아 왕을 했다는 것도 이를 방증합니다. 특히 3대 시조 중 하나인 석탈해 설화는 이런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석탈해 설화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궤짝이 도착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따랐다고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빼고 석(昔)을 성(姓)으로 삼고,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은 탈해(脫解)라고 했다.”
유이민과 토착민의 갈등 그리고 협력
물론 외부 세력이 들어올 때 두 팔 벌려 환영만 한 것은 아닙니다. “(궤짝이) 처음에 금관가야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는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죠. 석탈해 세력이 당초엔 가야 지역에 정착하려 했지만 이미 터를 잡고 있던 김수로 세력과 충돌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텃세를 과시한 김수로 역시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과 결혼해 나라를 세웠습니다. 허황옥 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던 거죠.
신라의 모체가 된 진한(辰韓)의 기록은 한반도 유이민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
4세기에 진수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專)」
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으로 왔다.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해 우리에게 주었다’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보아 이 구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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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민과 토착세력이 함께 건국한 나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백제도 유사합니다.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나타나자 온조가 남쪽으로 이동해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서 살펴봤듯이 한반도의 고대사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한반도에 들어온 여러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 갔으니까요.
토박이 사상이 강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보면,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에레크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이 떨어져 땅에서 태어난 아이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땅에서 솟아났다는 것은 토착 세력을 의미합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토박이(autochthon)'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땅에서 솟아났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은 난민을 인정하는 데 엄격한 편입니다. 1994년 난민법이 제정된 이후 작년까지 23년 동안 국내 난민 신청 건수는 3만2733건이지만 이중 인정된 것은 706건에 불과합니다. 일부에선 민족의식이 강해 타민족의 유입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한 번 받아주면 향후 계속해서 난민들이 유입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특성에 대해서도 염려합니다.
무엇보다 20세기 들어 인구가 폭증하고, 자원 고갈이 심화되면서 전반적으로 세계 각국이 유이민에 대해 점차 엄격해지는 분위기입니다. 그동안 온건한 정책을 펴온 유럽조차도 최근엔 문을 닫고 있으니까요.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입니다.
천 오백년 전 신라를 찾아온 난민, 아비딘 일행은 어떻게 됐을까요.
『쿠쉬나메』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신라의 보호 아래 아비딘과 신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파리둔은 훗날 조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되찾고 페르시아의 영웅이 됩니다. 이후, 자신을 도와준 신라를 어머니의 나라이자 ‘은인의 나라’로 받들어 양국은 영원한 우호를 다지게 됩니다.
이런 해피엔딩은 중세의 서사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일까요.
※이 기사는 이희근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 문화』, 김종성 『신라 왕실의 비밀』, 최혜영 『고대 아테네의 혈족 집단 신화와 외교술』,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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