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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66] 상처받지 않을 권리

바람아님 2018. 9. 29. 07:54

(조선일보 2018.09.29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백영옥 소설가


명절 연휴, 짬 나는 대로, 틈 나는 대로 밀린 드라마를 몰아서 봤다.

드라마를 다운받는 동안, 신문도 틈 나는 대로 읽었는데 명절과 관련된 기사 중,

매년 단골로 등장하는 여성의 독박 노동 문제 이외에 가족과 친척들의 오지랖 넓은 질문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에 대한 기사가 많아 놀랐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글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질문'이나 '충고'에 시달렸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방증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주인공이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어렵사리 회사 면접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한 심사 위원이 주인공을 향해 선심 쓰듯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 하나만 할게!" 그때 주인공이 선언하듯 했던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 붙이실 거 아니시잖아요. 그러니까 상처 주지 마세요. 저도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붙여줄 것도 아니면서, 소개해줄 것도 아니면서,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사줄 것도 아니면서,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내뱉는 '걱정을 빙자한 핀잔'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이다.

취업, 결혼, 육아, 부동산은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하나로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이슈다.

둘만 모여도 부동산 얘기, 셋만 모여도 취업 걱정인 대한민국 사회 아닌가.


정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라는 얘기조차 잘 살펴보면, 그 사람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내 마음의 불안을

그런 식으로라도 덜기 위한 행동일 때가 더 많다. 그걸 듣는 사람이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취업 준비 안 하고 뭐하냐고 캐묻는 둘째 작은아버지와 첫째 고모에게 노후 준비는 잘되시냐고 되묻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있나.


충고는 원하는 사람에게 하자. 추석 내내 질문에 시달렸을 청춘들을 위해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연애 버전 하나를 남겨두면 이렇다. 나에게 고백할 자유가 있다면, 상대에겐 거절할 자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