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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통일과 평화의 기반은 '탄탄한 경제'다

바람아님 2018. 11. 3. 05:52

(조선일보 2018.11.03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서독 정부, 동독인들에게 20여년 방문 '환영금' 주고 경제력 키우며 통일 준비
위기 직면한 남한 경제와 세계 최하 북한 경제 만나 '동반 몰락' 치달아선 안 돼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1989년 가을 박사 논문 자료 조사차 베를린에 머물던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장벽에 거짓말처럼 구멍이 뚫렸다.

그 사건은 사실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해 온 결과다. 그중 하나가 '환영금(Begrüßungsgeld)'이다.

서독 정부는 1970년부터 동독 주민들의 서독 방문을 돕기 위해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 왔다.

이유는 동독 정부가 제한된 소수에게만 서독 방문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동독 마르크화(Ostmark)를 서독 마르크화

(D-mark)로 바꾸는 액수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70마르크였던 환전 액수는 동독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15마르크로 떨어졌다.

이래서야 여행할 수 없으니, 서독 정부는 모든 동독 방문객에게 소액의 환영금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1988년에는 그 액수가 100마르크였다.


100마르크를 손에 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진다. 이 돈으로 무엇을 살 것인가?

아들이 오랫동안 졸라대던 농구화를 살 것인가, 막내딸이 꼭 사다 달라고 부탁한 바비 인형을 살 것인가,

아니면 아내가 이야기한 채소를 살 것인가?

모든 생필품이 부족했던 동독에서도 가장 부족했던 물자가 채소와 과일이었다.


한정된 액수 때문에 비싼 채소나 과일을 살 수 없었던 동독 사람들은 그중 값이 제일 싼 바나나를 주로 사가지고 갔다.

딱한 사정을 잘 아는 서베를린 사람들은 동베를린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오면 대개는 아주 싼값에 물건을 팔았다.

이런 식으로 서독 정부와 주민들은 동독 동포들의 마음을 얻어 갔다.


사회주의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나았다는 동독 경제도 실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직접 방문해 본 동(東)베를린의 열악한 상태는 충격적이었다.

중심 대로인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가에만 건물이 번듯할 뿐, 한 블록만 옆으로 가도 건물 유리창이 깨진 상태고,

포장이 제대로 안 된 도로는 시골길처럼 울퉁불퉁했다. 가게에는 상품이 거의 없었다.

바다같이 넓은 레코드 매장에 실제 팔 수 있는 상품은 작은 판매대 하나를 겨우 채운 카세트테이프가 전부였다.

연주자들은 세계 최정상 수준이건만 그들의 연주를 담아낼 수 있는 상품을 만들 물자가 부족했던 것이다.


동독 경제는 엉망진창 상태에 빠졌다. 독일인 특유의 성실한 노동 윤리 같은 것은 잊힌 지 오래였다.

열심히 일해 봐야 손에 돌아오는 게 없는 마당에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심하면 한 시간 앉아서 기다려야 겨우 주문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나절 기다린 후

제국주의 미국의 콜라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이상한 맛의 동독 콜라와 조막만 한 햄버거를 받는다.


경제 사정은 나빠도 자연만은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을까? 그런 기대 또한 난망이다.

경제가 워낙 비효율적이다 보니 '약탈적' 산업 방식에 의존하게 되어 환경오염이 극심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가난하더라도 깨끗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다정하게 살아간다는 식의 망상은 빨리 접는 게 좋다.


서독 정부는 처음에 호의를 가지고 동독 주민들의 방문을 환영했지만 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소수의 방문객이 찾아올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장벽이 무너지자 엄청난 수의 동독 주민이

서독에 넘어와서 돈을 받기 위해 은행이나 시청 앞에 장사진을 쳤다.

1988년에 2억6000만 마르크였던 환영금은 장벽이 무너진 후 30억~40억 마르크로 급등했다.

결국은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와 1대1로 환전하되 100마르크까지만 허용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꾸어 운영하다가 통일을 맞으며 중단되었다.


통일 무렵 서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탄탄한 경제를 자랑했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통일 당시 서독 수준만큼 강하지도 않고, 북한 경제는 1인당 GDP가 2000달러에도 못 미쳐

우리의 20분의 1 수준으로 추산된다. 더구나 최근 우리 경제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남한 경제와 세계 최하 수준의 북한 경제가 만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대립과 갈등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향한 단초를 열어간 데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지만,

그 결과 오히려 남북 동반 몰락으로 치닫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우선 우리 경제부터 잘 지키면서 장기적으로 냉철하게 대비하는 게 평화와 통일을 위한 최선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