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8.11.08. 22:34
온통 나라 걱정이다. 지난 주말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KTX역 대합실에서 노인들의 말을 귀동냥하게 되었다. “우리야 얼마나 더 살겠노. 자식들 살아갈 세상이 걱정이제.” “신혼부부 집 찾아주는 일자리를 만든다고? 나랏돈을 그렇게 막 쓰면 어떡하노.”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외친 ‘함께 잘 사는 나라’도 도마에 올랐다. “대기업은 쥐 잡듯이 하고 노조들만 살판이 났제. 이게 함께 잘 살자는 건가?”
대통령은 함께 잘 사는 길로 가기 위한 덕목으로 포용을 꼽았다. 포용은 너그럽게 타자를 끌어안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포용 국가, 포용적 성장, 포용적 번영, 포용적 민주주의에서처럼 어떤 수식어가 붙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배척한다면 포용이라고 할 수 없다.
초록동색인 사람끼리만 서로 감싸고 돌봐주는 것은 ‘반쪽 포용’에 불과하다. 요즘 주위에는 그런 짝퉁 포용이 넘쳐난다.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 공격한다. 적폐의 딱지를 붙여 인격 살해도 서슴지 않는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토양을 오염시키는 악성 질환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설혹 타자와 타 정권이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그들에게 함부로 적폐의 낙인을 찍어선 안 된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싫든 좋든 공동운명체이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신호등을 받고 같은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함께 살아가는 국민끼리 총질을 하는 것은 공동체의 기반을 허무는 반국가적 행위이다. 내가 그들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들 역시 나를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보복은 복수의 앙갚음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내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처단하면 그들 역시 훗날 똑같은 깃발을 내걸고 나를 징치할 것이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 집권 1년반이 되도록 ‘적폐의 배’에 머물러 있으면 국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상대를 포용하는 마음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 이념 갈등이나 선거의 전쟁에서 감정의 앙금이 남았다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칼을 녹여 쟁기로 만들어야 한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자면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 지혜를 발휘한 인물이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링컨 대통령은 자신의 정적인 에드윈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원수를 없애야 하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참모들에게 “원수는 마음에서 없애 버려야지”라고 응수했다. 링컨은 바다 같은 포용력으로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끝나자 총칼을 녹여 만든 쟁기로 미국 부흥의 밭을 갈았다.
문 대통령의 초심도 링컨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의 가슴을 울린 취임사의 구절을 되새겨보면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라고 외친 그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포용의 언어만 유령처럼 허공에 떠돌고 있지 않은가.
지금 대한민국은 많이 아프다. 경제가 아프고 안보도 아프다. 일자리는 ‘고용 참사’라는 희귀병에 걸렸고, 자영업자는 최저임금 후유증에 시달린다. 국가안보는 평화의 환각증을 앓고 있고, 한미동맹은 이미 불협화음의 진단이 내려졌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배를 만져도 아프고 허리를 만져도 아프고 만지는 곳마다 아프다면? 그것은 손가락이 부러진 것이다. 청와대의 실상이 그렇다. 고장 난 손가락으로 어떻게 경제와 안보의 질환을 고칠 수 있겠는가. 남을 손가락질하는 자기 손가락의 상태가 정상인지부터 먼저 살필 일이다. 급한 것은 치국(治國)이 아니다. 수신(修身)이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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