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이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부시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편지다.
부시 전 대통령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기 전 이 편지를 집무실 책상 위에 놔뒀다고 한다. 부시 전 대통령이 작고하자 클린턴 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에 이 편지 전문을 공개하면서 이 편지만큼 부시 전 대통령의 인품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은 정적(政敵) 관계였다. 근현대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재선을 하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부시는 현직 대통령임에도 클린턴에게 패했다. 그럼에도 정적에게 아량을 보였다. 미국의 정치 문화는 정적에게는 아량을, 과거에는 관용을 보이는 문화다. 정적에게도 성공을 기원하는 정치 문화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1986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국은 이란-콘트라 게이트로 몸살을 앓았다.
이란-콘트라 게이트란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NSC)가 레바논 과격 무장단체에 의해 억류된 미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적성국인 이란에 주선을 부탁하고 그 대가로 테러집단 후원자인 이란에 고성능 미사일을 판매했으며 판매대금 일부를 니카라과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에 지원한 사건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첫째, 적성국 이란에 어떤 무기 수출도 금지한다는 원칙, 테러집단과는 어떤 흥정도 하지 않는다는 미국 행정부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점이다. 둘째, 콘트라 반군 지원은 콘트라 반군에 대한 일체의 직접적·간접적 지원을 금지한 의회의 ‘볼런드 수정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그래서 이 게이트는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1992년 부시 전 대통령은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사면했다. 이들이 사면되자 부시 전 대통령의 게이트 관련 여부 의혹이 줄줄이 제기됐다. 다시 말해 이란-콘트라 게이트는 레이건과 부시 두 대통령을 한꺼번에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사안이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이른바 ‘화이트워터 게이트’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 1978년 클린턴 당시 아칸소주 검찰총장은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맥두걸 부부와 함께 북부 화이트워터 지역에 휴양단지를 짓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위해 설립한 부동산 회사의 이름이 ‘화이트워터’였다. 이후 맥두걸은 미 연방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주지사였던 클린턴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클린턴 부부는 1992년 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다섯 달 지난 후인 1993년 6월, 화이트워터 관련 서류를 보관하던 힐러리 동료 변호사 빈센트 포스터가 의문의 자살을 하고 힐러리가 서류를 파기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게이트로 번졌다. 이 문제에 대해 청문회와 특검 조사를 받은 클린턴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당시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후임인 아들 부시 전 대통령도 이른바 리크(leak) 게이트에 시달렸다. 리크 게이트는 한마디로 부시 행정부에 의한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올바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 전직 정부 관료에 대한 백악관 차원의 보복 의혹에 관한 문제다. 이 역시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없음을 인정할 수 없는 백악관 입장과 관련된 것이어서 상당히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이처럼 미국도 파헤치면 얼마든지 대통령을 탄핵하고 감방으로 보낼 수 있는 사안이 즐비했다. 그랬음에도 미국은 재임 당시에는 특검을 꾸리며 조사를 벌이지만 퇴임 이후에는 덮고 그냥 놔뒀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끝까지 파헤친다며 전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을 감방에 처 넣고도 남을 일을 미국은 그냥 덮고 지나갔다.
그냥 덮고 지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왜 대통령의 의혹을 퇴임 이후에 그냥 놔둘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국가적 통합을 위해 ‘살아 있는 신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미국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콘트라 게이트 주인공 레이건 전 대통령은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신화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미국은 잘 아는 셈이다.
둘째, 미국인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견제가 죽은 권력에 대한 단죄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 나타난 문제는 특검을 비롯한 각종 장치를 통해 파헤치고 실제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까지 받아내며 현 권력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퇴임한 대통령인 죽은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하다.
물론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이유는 현재와 미래에 그와 유사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은 현 권력에 경고를 줌으로써 미래 권력에 경종을 울리는 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권력을 단죄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분열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미국은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정권을 단죄할 때 발생하는 정치 보복 논란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 정권의 비리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적폐 청산 효과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을 비교하면서 비리 문제에 접근한다는 얘기다.
지금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감팀이 받고 있는 의혹은 권력과 연계된 비리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여당 입장이 매우 특이하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런 문제에 관해 다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책임을 져야 되기 때문에, 그런 야당의 정치 공세에 관해서는 저는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라며 개인적 일탈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을 수 있는 개인적 일탈이라면, 왜 청와대는 반부패비서관실 특감팀 전원을 원대복귀시켰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특감팀을 원대복귀시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 전용기 기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이런 국내 현안에 대해 질문하자 대통령은 “국내 현안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며 외교 사안만 물으라고 했는데, 이 또한 보기 드문 일이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은 소통을 중시하는 정권에서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과거 권력에 대해서는 엄격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과거를 파헤치는 것에는 매우 적극적인 반면 현재 자신들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인색한 것이 아닌지 청와대 측은 생각해야 한다.
과거 정권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관대하다면, 이는 정치 보복이라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과거 적폐를 단죄하는 단호함으로 자신들의 문제에도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신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폐단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는 들지 않게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미국과는 반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런 식의 모습은 상당 수준의 사회적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그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당사자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7호 (2018.12.12~12.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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