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태평로] 대학도 떠난다, '갈라파고스의 나라'를..

바람아님 2018. 12. 11. 09:21

조선일보 2018.12.10. 03:15

  

말레이시아에 본부 두고 6~7개 아시아대와 공유 등 脫한국 조짐
정부가 계속 혁신·실험 막으면 대학도, 산업계도 落後될 것
안석배 사회정책부장

지방에서 내실 있게 학교를 꾸리고 있는 한 대학 총장을 최근 만났다. 학생은 줄고 돈줄은 말라가는 요즘 대학가 이야기를 하던 그 총장은 "그래서 우리는 해외 대학과 '공유대학'이란 걸 해보려 합니다"라고 했다. 학생들을 뽑아 아시아 6~7개 대학 캠퍼스를 돌며 공부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몇몇 해외 대학과는 의견도 모았다고 한다.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총장님이 제안했으니 대학 본부는 한국에 두겠네요?"라고 묻자, "그게… 말레이시아에 둘 겁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행법상 우리나라는 새 대학을 만들려면 건물과 땅이 있어야 한다. 기존 대학 캠퍼스를 이용하면 불법 시비가 생긴다. 게다가 한국에 대학 본부를 두는 순간 교육부의 감시와 규제도 시작된다.


카이스트는 지난해 정원 50명 규모의 무(無)전공 학과인 융합기초학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1학년을 전공 없이 지내다 2학년 올라갈 때 전공을 정하는데, 융합기초학부 학생들은 4년간 전공을 뛰어넘어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했다. 융합 인재를 키우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3월 이 학과가 출범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 안(案)은 과기정통부에 막혀 있다. 과기부는 과거엔 이를 "교육 선도 모델"이라더니 최근에 입장이 바뀌었다 한다. 대학이 학과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런 카이스트도 늘 하는 말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교육부 산하가 아니잖아요. 그 덕에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죠."


주한유럽상의가 최근 '한국은 세계에 유례없는 독특한 갈라파고스의 규제 국가'라고 했다. 자동차, 제약 등 산업 규제를 일일이 열거하며 100쪽이 넘는 실태 보고서를 펴냈다. 만약 외국 대학이 한국 대학정책 규제 보고서를 만들면 분량이 얼마나 됐을까. 최근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학 중 한 곳이 애리조나주립대다. 이 대학은 GFA (Global Freshman Academy)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 세계 어디서든 온라인으로 1학년 학점을 취득할 수 있게 한다. 올해 180여 개국 23만여 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 신생 대학인 미네르바대학은 아예 캠퍼스가 없다. 대신 학생들이 전 세계 도시를 돌며 프로젝트 교육으로 배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이런 시도를 하면 바로 '불법' 딱지가 붙을 것이다.


대학은 끊임없이 변해야 살아남는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절실한 쪽은 대학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무원들이 길 중간에 버텨서 간섭하고 방해한다. 과거엔 교육부였는데, 이젠 교육부와 과기부 협공(挾攻)이다. 두 부처 공무원은 과거에 잠시 '같은 집'에 근무했다. 10년 전 교육과학기술부란 이름으로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합쳐졌다. 몇 년 후 둘은 헤어졌지만 그때 과기부 공무원이 교육부에서 제대로 '한 수' 배운 듯하다. 요즘 과기부가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대학 총장과 과학계 인사들 표적 감사하고 내쫓는 것을 보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갈라파고스는 그 생태계를 즐기고 만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정부만 답(答)을 아는 듯 규제하고, 간섭하고, 참견하고, 길잡이 노릇 하면 우리는 영영 남태평양의 고도(孤島)일 수밖에 없다. 가장 창의적이고 실험적이어야 할 대학부터 낙후되면 산업계는 말할 것도 없다. 교육부 고위 인사가 언젠가 "대한민국은 지금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궁금한 건 교육부와 과기부는 지금 어느 시대 행정을 펴고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