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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31] 권장할 노년의 사치

바람아님 2018. 12. 25. 06:13

(조선일보 2018.12.25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로마 공화정 시대의 탁월한 정치가이며 웅변가, 사상가였던 키케로는 저서 '노년에 대하여'에서

"나이를 먹어서 누릴 수 없게 되는 즐거움은 더 고차적이고 세련된 즐거움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자는 섭공(葉公)이 제자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을 안 했다는 말을 듣고

"너는 왜 내가 배우기를 좋아해서 공부에 몰두하면 먹는 것도 잊으며 [道를] 깨닫게 되면 즐거워서

근심조차 잊어버려 늙어가는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랐다(논어 술이편 18장).


올해 85세인 전상범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에 생애 40번째 저서 '주석과 함께 읽는 햄릿'을 출간했다.

요즘은 대부분 대학 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가 필수 이수 과목이 아니라서 셰익스피어와 일면식도 없이 영문학사, 석사가

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 애석해서 누구나 셰익스피어를 쉽게 접하고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를 펴낸 것이다.


전 교수는 집필에 앞서, 자신이 고령으로 체력도 쇠퇴했고 얼마간 지병도 있는 터라서, 작업 속도를 정했다고 한다.

선정한 텍스트의 한 페이지씩만 매일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올해 1월 1일부터 매일 오전, 주석서 열 권과 번역서 여섯 권을 펼쳐 놓고

그날분 페이지에서 세월과 함께 의미가 달라진 단어, 변한 문장의 구조, 셰익스피어의 특이한 어휘 구사, 신조어,

합성어, 언어유희, 역사적 또는 당대 사건에 대한 암시 등에 관한 제일 타당하고 우수한 주석(註釋)을 고르는 데

대개 2~3시간씩 걸렸고, 정확히 206일 만에 206페이지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 작업을 끝냈다고 한다.


우리도 이제 고령화 시대가 되어 노년의 권태와 우울이 국가적 문제인데, 사실 오늘날 중년 이상 세대는 대부분 '생업'에

목을 매 취미나 적성을 희생하고 살았다. '밥값'을 대강 했으면 이제부터 늘 하고 싶었던 것을 해봐도 되지 않겠는가?

어떤 지인은 취미로 그림을 그려서 개인전도 열고, 어떤 지인은 잊힌 유행가 가사를 수집하기도 하고

내 고장이 낳은 인물을 탐구하기도 하면서 만년(晩年)의 사치를 톡톡히 누린다.

무엇이라도 내게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한 가지 절도 있게 꾸준히 하면 오늘이 소중하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생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라의 품격도 저절로 올라갈 것이다. 




전상범 서울대 명예교수

주석과 함께 읽는 햄릿
저자 전상범/ 한국문화사/ 2018.11.10/ 549 p

842-ㅅ414햅/ [정독]어문학족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