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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크리스마스 보내며 지키지 못한 '구상나무'를 생각한다

바람아님 2018. 12. 30. 07:34

조선비즈 2018.12.29. 05:01

 

크리스마스가 지났어도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은 여전히 도시의 어둠을 밝힙니다. 축제의 의미도 있지만 불우한 이웃을 돕는 시기라는 의미가 크리스마스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상나무(제주도 한라산)는 잃어버린 식물자원이다.

저 같은 사람은 크리스마스 하면 잃어버린 식물자원이 된 비운(?)의 우리 나무를 떠올립니다. ‘미스김라일락’과 함께 우리의 나무지만 우리의 것으로 지켜내지 못한 구상나무 말입니다.

구상나무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00년 이후의 일입니다. 식물주권은 물론이고 나라의 주권마저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있던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식물 채집 활동을 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프랑스의 포리 신부와 타케 신부입니다. 말이 신부지 그분들은 식물 채집가나 다름없었습니다.

전북 덕유산의 눈 덮인 구상나무

그들이 어느 날 한라산에서 채집한 나무 중 하나를 미국 하버드대의 식물분류학자 윌슨에게 보낸 것이 시작입니다. 흥미를 느낀 윌슨 박사는 1917년에 일본의 나카이 박사의 안내를 받아 제주도로 와서 그 나무를 채집해 아놀드 수목원으로 가져갑니다.

연구 결과 그 나무가 분비나무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신종으로 등록합니다.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밖에 없는 한국특산식물로 말입니다. 그 나무가 바로 구상나무입니다. 그 후 해외로 유출된 구상나무는 품종 개량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거듭났습니다.

구상나무 고사목(제주도 한라산)

‘Korean fir’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인기 높은 크리스마스트리로 팔리는 나무가 우리의 구상나무이고, 그래서 우리의 고유종임에도 사용료를 내고 역수입하는 나무가 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한번 빼앗긴 식물자원에 봄은 오지 않는 걸까요? 크리스마스가 뭔지, 그리고 유전자원의 소중함이 뭔지 깨닫기도 전에 빼앗겨버린 우리의 식물자원이 바로 구상나무입니다.

구상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분비나무(강원도 정선군 함백산)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의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의 1000m 이상 고지대에서 자랍니다. 유사종인 분비나무와 달리 전북 덕유산 이남의 지역에서만 자라는 남방계 식물로 봅니다. 속리산에 이어 소백산에서도 발견됐다는 보도 자료가 있으나 실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못할 일입니다.

설경으로 유명한 덕유산은 구상나무가 왜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높은지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해의 습한 대기가 내륙의 높은 산인 덕유산을 넘으면서 많은 눈을 뿌려대면 고승(高僧)이 그려낸 수묵화처럼 주변 산의 설경이 아름답습니다.

드문드문 자라는 가문비나무(전북 덕유산)

그곳에서 만나는 멋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나무는 십중팔구 구상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좀 더 일찍 전래됐더라면 눈 덮인 구상나무의 모습에서 우리가 먼저 크리스마스트리로 개발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다 지나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 아쉽지만, 구상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 눈에 좀 더 일찍 발견됐어야 합니다.

가문비나무의 열매를 아래를 향해 달린다

최근에는 제주도 한라산의 구상나무가 집단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식물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구상나무를 살리기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 규명과 대책 수립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사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지구온난화와 이상고온으로 인한 수분 부족으로 말라죽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최근 연구로는 오히려 구상나무의 뿌리에 많은 수분이 있어 해를 끼친다고 합니다. 그 외에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 언젠가 합당한 연구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좀 더 풍성한 구상나무 숲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문비나무의 잎은 끝이 갈라지지 않고 뾰족하다

그런데 구상나무는 유사종인 분비나무와 확연하게 다른 나무가 아닙니다. 구상나무에 비해 분비나무는 잎이 좀 더 가늘고 열매의 실편 끝이 뒤로 젖혀지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습니다.

사실 잎이나 열매의 실편 모양으로 구분하는 식별포인트조차 분명한 경계선을 이룬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두 나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구상나무(또는 분비나무)의 잎은 끝이 둘로 갈라진다

어쨌든 분비나무 역시 구상나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므로 크리스마스트리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유독 구상나무만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높은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구상나무와 달리 중국 동북부, 러시아 동부, 몽골, 한국 등 몇몇 나라에서 자라는 분비나무는 희소성이 부족하다 보니 인기가 낮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면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나무인데 말입니다.

독일가문비의 겨울 모습(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

덕유산에서 구상나무는 아닌데 멋진 수형을 가졌다 싶은 나무를 만난다면 혹시 가문비나무일지도 모릅니다. 나무껍질이 검다 하여 ‘검은피(皮)나무’라고 하던 것이 변해 가문비나무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 덕유산, 계방산 이북의 높은 능선에서 비교적 드물게 자라는 나무로, 눈이 쌓이기 좋은 형태로 자라는 건 구상나무 또는 분비나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독일가문비의 열매는 독일 소시지처럼 크다

다만, 구상나무나 분비나무는 열매가 위를 향해 달리고 잎끝이 둘로 갈라지는데, 가문비나무는 열매가 아래를 향해 달리고 잎끝이 갈라지지 않고 뾰족한 점이 다릅니다. 이 정도만 알아도 덕유산에 드문드문 분포하는 가문비나무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문비나무와 비슷한 도입종 나무로 독일가문비가 있습니다. 가문비나무와 달리 독일가문비는 가지 끝이 위를 향해 들려 있어서 처마를 연상시킵니다. 관공서나 수목원 등지에 흔히 심으며 열매가 가문비나무보다 훨씬 커서 독일 소시지를 달고 있는 듯합니다.


유럽에서는 이 독일가문비를 흔히 크리스마스트리로 이용합니다. 그러니 구상나무의 가장 큰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료를 벌어다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구상나무, 아니 코리안 퍼(Korean fir)의 선전을 기대합니다. 올해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리가 독일을 2 : 0으로 이겼습니다.


이제 곧 새해가 밝아옵니다. 맘 놓고 발음하기 곤란했던 2018년을 떠나보내고 2019년을 맞아 새 출발 할 좋은 기회입니다. 늘 푸를 것만 같은 상록침엽수들도 실은 2~3년에 한 번씩 새잎으로 바꿉니다. 모쪼록 새해에는 새잎을 달고 끝까지 상록(常綠)하는 나무가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