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1812년 가을, 유배지의 답답한 마음도 풀 겸 해서 제자 초의(草衣)와 윤동(尹 山+同-산이름 동)을 데리고 월출산 나들이를 한다. 옥판봉 아래 백운동 이씨의 집에서 하루 묵고 돌아와, 그곳의 12승경을 시로 읊었다. 그림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白雲洞圖)'를 그리게 했다. 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白雲帖, 각주- 20쪽 짜리 시화첩 형식의 작품)'이 남아 있다. 다산은 이 서첩의 끝에 역시 초의를 시켜 '다산초당도'를 남겼다.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강진의 백운동은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몇 안 되는 별서(別墅)다. 민간 정원으로는 특이하게 집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인위적으로 끌어와 뜰의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시냇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지으며 노니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자취는 경주 포석정뿐 아니라 창경궁 안에도 남아있다. 민간 정원의 것으로는 이곳의 규모가 가장 크다.
백운동 원림은 17세기에 처사 이담로(李聃老·1627~?)가 처음으로 조성했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李時憲·1803~1860)은 다산 문하의 막내 제자다. 그의 5대손인 이효천(李孝天) 옹이 지금도 백운동을 지키고 있다. 11대를 이어오며 지켜온 유서 깊은 공간이다.
석축 유구와 화계(花階·계단식 꽃밭), 건물터의 주춧돌만 남아 있던 이곳이 최근 강진군의 꼼꼼한 복원 사업으로 본래의 제 모습을 점차 회복해 가고 있다. 초의의 백운동 그림이 워낙 세밀한 데다 12승경을 노래한 다산의 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 우리는 호남의 유서 깊은 정원 하나를 되찾게 되는 셈이다.
백운동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곳이 우리 차문화의 중요한 현장이란 사실이다. 이시헌은 이덕리(李德履·1728~?)가 지은 '동다기(東茶記)'를 필사해 세상에 전했다. 그는 직접 떡차를 만들어 두릉의 다산에게 보내기도 했다. 일제시대 이한영이란 이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만들어 판매한 곳도 이 근처다. 백운동 원림의 바로 뒤쪽은 지금 아모레퍼시픽 다원의 너른 차밭이 자리 잡았다. 집주인은 지금도 옛 방식에 따라 집 뒤 대밭에서 나는 야생차로 차를 덖어 가까운 이들과 나누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