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교육학
모교서 찾은 김형석 교수 수필집
까까머리 학창시절 추억 떠올라
수영·강연·신문기고…의욕넘쳐
진정한 교육자의 사명감 가르침
“주님! 病者를 더 사랑해주세요”
식사前 기도, 아직도 가슴이 찡~
교내 연구실 책꽂이에는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이 꽂혀 있다. 제목은 ‘영원과 사랑의 대화’이다. 이 책이 나에게 온 사연이 있다.
오래전,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도서관의 낡은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학교에 와서 정든 책을 골라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모교를 찾아갔다.
도서관 앞마당에는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그 책이 바로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9년 판)이다.
입시 공부에 지치면 열람실에 가서 그 수필집을 펼치고는 김 교수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추억의 책을 내가 소장하게 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책은 낡을 대로 낡아 책등은 청테이프로 감싸졌고, 하드 커버 모서리는 둥그렇게 닳았다. 반갑게도 대출 카드가 옛 모습대로 꽂혀 있었다. 학번과 선생님의 존함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를 보자 가슴이 아련해지면서 까까머리 시절이 떠올랐다.
모교는 인천 자유공원 기슭에 있다. 도서관은 햇빛이 잘 드는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개가식으로 운영하고 있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주로 문학책을 읽었다. 이광수·김동인·황순원의 소설과 헤르만 헤세, 도스토옙스키, 모파상의 소설도 읽었다. 수필집으로는 당시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김 교수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와 숭실대 안병욱 교수님의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을 애독했다. 김 교수님의 글은 잔잔한 물가로 이끌듯 쉽고 부드러웠고, 안 교수님의 글은 높은 산을 오르듯 힘차고 강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김 교수님이 출연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교수님은 올해 100세를 맞이했다. 연세대에서 철학 교수로 정년 퇴임한 지도 서른 해가 훨씬 넘었다. 세 자리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셨다. 하루에 한 시간씩 동네를 산책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2층 방을 오르내린다. 정년 후부터는 수영을 하고 있다. 수영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 택했다. 지금도 물안경과 캡을 쓰고는 평영을 즐긴다. 강연과 신문 원고는 아직도 만년필로 쓴다. 세상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오래된 습관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한다. 한 해 강연 횟수가 160회를 넘는다. 이러한 교수님의 현재진행형 모습은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내가 받은 가르침은 ‘교육자의 사명감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진정성 있는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년 퇴임 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이다.
교수님의 표정과 말씀은 늘 부드럽고, 따뜻하다. 모든 언행에 겸손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이 배어 있다. 교수님이 식사 전에 드리는 기도는 아직도 내 가슴에 찡하게 남아 있다.
“저에게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중에 있는 모든 분을 주님께서 저보다 더 사랑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에게도 건강을 주시고 함께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 뜻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고 많은 분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제가 도움과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 속에 교수님의 가슴속 생각과 모든 삶이 담겨 있다.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철학책과 수필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영상을 통해 참됨, 착함,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다.
교수님의 이층집 벽에는 안병욱 교수님과 함께 찍은 대형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두 분은 출생 연도도 같고 고향도 같은 평안도이다. 안 교수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묘소는 이북 고향과 가까운 강원도 양구에 있다. 교수님도 세상을 떠나면 안 교수님 곁에 묻힐 것이라 한다. 양구에는 인문학박물관이 있다. 그곳에는 두 교수님의 철학 세계를 펼쳐 놓은 ‘철학의 방’이 있다. 교수님은 그 방에 이런 글을 써놓았다.
‘안병욱 선생과 나는 같은 해, 같은 고장에서, 같은 일로 90평생을 함께 보냈습니다. 겨레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 이제 우리의 길은 끝났습니다. 우정을 나누면서 뒤따라오는 이들을 위해 한 알의 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은 그곳에 많은 것을 갖다 놓았다. 평생 글을 쓰던 책상과 의자를 비롯해 수많은 책과 소중히 간직해온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두 교수님과 각별히 친교를 나누던 또 한 분이 있다. 바로 서울대 철학과 김태길 교수님이다. 당시 한국 철학계를 이 세 분이 이끌고 나갔다. 나는 김형석·안병욱·김태길 교수님을 ‘철학의 청록파’라 부른다. 이분들이 철학의 순수함을 문학적으로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문학 박물관에는 시인의 방이 있다. 그곳에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을 비롯해 김소월·김영랑·정지용·백석·윤동주·한용운·서정주·이해인의 시 세계가 펼쳐져 있다.
교수님은 이제 자연적인 생명이 삼사 년 남은 것 같다고 말한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겠다고 한다. 마치, 친구였던 윤동주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철학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있다.
나라의 큰 어른이 세상을 많이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한경직 목사, 안병욱 교수, 김태길 교수 등. 이제 김형석 교수님만 홀로 남아 우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글에 언급된 서적]
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에세이
책소개 “누구에게나, 오를 수 있는 인생의 산이 있다.” 100세를 목전에 둔 철학자가 새로이 들려주는 인생의 의미, 영원에 대한 그리움. 원로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김형석 교수의 대표작. 1960년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60만 부 판매를 기록한 경이로운 베스트셀러. 집집마다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 있던 삶의 지침서. 100년이란 세월을 산 철학자가 과거에 젊은이였던 이들과 지금의 젊은이들을 향해 애정을 담아 건네는 인생 이야기! 당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철학자로서의 답변에서부터 인생의 의미에 대한 성찰, 죽음과 영원에 대한 묵직한 사유까지, 서정적이고 단아한 산문에 철학자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담았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저자 1943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사상계》 주간, 흥사단 이사장,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사상', '마음의 창문을 열고', '행복의 미학' 등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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