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時事·常識

[魚友야담] "덕분에 미식의 눈을 떴습니다"

바람아님 2019. 4. 13. 21:46

(조선일보 2019.04.13 어수웅·주말뉴스부장)


[魚友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어수웅·주말뉴스부장


#1. 종로 3가 서울극장 뒷골목에 있었습니다, 그 식당은. 마주치면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서는

지날 수 없는 좁은 골목. 하지만 노릇노릇한 생선구이와 살짝 눌어붙은 누룽지 돌솥밥에 홀려

식객들은 허름한 밥집을 귀신같이 찾아냅니다. 이날 점심은 유난히 반주(飯酒)가 당기더군요.

소주 한 병을 주문합니다. 맘씨 고운 여주인이 업소용 스테인리스 물컵만 석 잔을 가져옵니다.

사람 수에 맞춰 정확히 3등분 한. 낮술 금지가 우리 식당 원칙이라며 눈을 찡긋하더군요.

물컵의 소주가 달았습니다.

#2. 비 오는 밤, 명륜동 성균관대 주변의 이면도로. 하숙집과 밥집이 계통 없이 섞인 골목에 삼장법사

둘째 제자 이름으로 지은 중국 요릿집이 있습니다. 아니, 요릿집이라기에는 민망한 규모의 대학가 식당.

하지만 무려 100여 가지의 요리와 덮밥을 1만원 안팎에 냅니다.

이날은 마오쩌둥이 좋아했다는 일종의 삼겹살찜 훙사오러우(紅燒肉)와 향긋한 가지를 중심으로 한 위샹러우쓰

(魚香肉絲)를 시켰습니다. 유리창 따라 빗물이 흐르고, 고량주는 식도 따라 흘러 내리고. 대취였죠.


#3. 마감날 저녁은 늘 함께 술과 밥을 먹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말 그대로 전 부원이 식구(食口)죠. 하지만 매번 같은 식당을 갈 수는 없는 일.

지난주엔 서부역 인근 삼겹살집을 찾았습니다.

돌판에 굽는 묵은지와 삼겹살. 밑반찬으로 내놓은 갈치속젓과 취나물도 기가 막히더군요.


가성비 좋은 맛집이라는 점 외에 세 식당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랜드마크 주변이나 대로변이 아니라 모두 으슥한 곳에 있다는 것.

대한민국의 음식 소비 패턴과 창업 방식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이라는 ‘손안의 지도’를 지닌 세상, 맛있고 매력 있다는 소문만 나면 손쉽게 좌표를 ‘찍고’ 찾아가죠.

식당 주인도 마찬가지. 구태여 비싼 임대료 내고 목 좋은 곳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줄었습니다.

이제 서울 웬만한 동네 골목은 어디나 그들만의 번화가가 될 수 있죠.


사설이 길었습니다. 주 1회 맛집 탐방은 주말뉴스부의 소박한 전통입니다. 1년 정기 근무를 마친 후배 기자는

시장 뒷골목 횟집에서 가진 환송식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장 덕분에 미식(美食)의 눈을 떴습니다.”


짜웅’, 아니 아부라는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진 못했습니다. 맛있는 주말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