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오후여담>정조 '욕보이기'

바람아님 2019. 5. 3. 07:56
문화일보 2019.05.02. 12:20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외유내강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으로 꼽힌다.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1776년 왕위를 물려받아 24년간 조선을 통치하면서 탕평의 정치를 펼쳤던 리더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 돼 뒤주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11세 때 목격했지만, 연산군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보복 정치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못 지킨 회한이 컸지만, 고른 인재 등용 원칙도 저버리지 않았다. 요즘 식의 ‘적폐청산’ 국정으로는 나라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학자인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은 “세종 다음 정조”라고 말한다. 조선 전기를 이끈 세종에 비견되는 후기의 대표적 임금이라는 뜻이다. 최근 이 전 총장은 수원 화성행궁과 융·건릉 현장에서 진행한 강연에서 “정조가 세종 다음으로 꼽히는 것은 사색당파를 떠나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조는 아름다움과 따뜻함, 배려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아름다움은 적(敵)도 이긴다”는 신념으로 화합의 정치를 밀고 나갔다. 다산 정약용을 아껴 중용했지만, 정적들이 해임을 요구할 때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던 것도 화합에 대한 의지 때문이라는 게 이 전 총장의 해석이다.


패스트트랙 강행으로 난장판이 된 정치판에 느닷없이 정조가 소환됐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5일 “정조대왕 이후 219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10년과 문재인 대통령 2년 등 12년을 빼고는 일제강점기이거나 독재 또는 아주 극우적인 세력에 의해 나라가 통치됐다”고 말했다. 바꿔말하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지도자 중 3인의 진보 대통령만이 정조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의 어디가 정조 리더십과 닮았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화합의 정치 측면에서 본다면, 김 전 대통령만이 DJP 연합의 정치를 했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야당과의 연정을 추구했지만 실행하진 못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의 약속이 무색하게 내 편만 고집하고 있다. 다산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한사코 감싸는 것만 봐도 문 대통령이 얼마나 정조의 탕평 리더십에서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까지 억지로 왜곡하면 정조를 욕보이는 일이다.

이미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