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5.18. 03:01
추억은 힘이 셉니다. 오늘의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힘센 추억을 단 하나도 갖지 못했다면, 오늘 당장 만드세요. 곁의 사람에게 사랑한다, 사랑해달라 말하세요.홍여사
늦은 밤, 웬일로 아내가 분주합니다. 이 서랍 저 서랍 열어서 가위와 테이프를 꺼내놓더니 어디선가 돌돌 말린 포장지 막대를 가져옵니다. 그걸 보니 문득 떠오르더군요. 아, 내일이 바로 어린이날이구나. 그새 아내는 부엌 다용도실에 숨겨뒀던 상자 두 개를 들고 나오더니 마치 나를 위한 선물인 양 쭉 내밀며 환하게 웃습니다. 짜잔~
엄지를 치켜세워 화답했더니 아내는 냉큼 내 곁으로 다가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익숙한 손길로 포장지를 자르고 붙입니다. 준비된 선물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속 수퍼히어로들과 우주선. 열 살, 열한 살, 두 아이가 각각 원하는 걸로 고른 모양인데, 제 눈에는 그 둘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만 사서 둘이 나눠 가며 놀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가격도 만만찮을 텐데….
하지만 저는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제에서는 부부간 대화의 벽을 별로 못 느끼지만, 저희는 유독 아이들 용돈이나 선물을 결정할 때 느끼곤 합니다. "비싼 장난감 사줘 봤자 사흘이면 심드렁해하더라고." 제가 반대하면 아내는 "애들 장난감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평소 "아이들에게 궁한 것이 전혀 없으니 모처럼 뭘 사 줘도 감사할 줄을 몰라"라고 투덜대면, 아내는 "대신 요즘 아이들은 마음에 그늘이 없지 않으냐"고 합니다. 나중에 철들면 부모가 저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깨달을 거라고요. 만일 오늘 내가 "비슷한 장난감 두 개 사주지 말고 큰 녀석 몫은 통장에 저금해주지 그랬냐"고 말한다면 아내는 한숨을 쉬며 대답할 겁니다. "당신이 열한 살 아이 같으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 동생은 로봇을 선물 받는데, 나는 통장 잔고의 숫자만 확인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나는 주위에 흩어진 포장지 조각들을 긁어모으며 씁쓸히 웃습니다. 그 옛날 열한 살 소년이던 저 자신의 '슬픈 현실'이 문득 떠올라서 말입니다. 제 부모님은 어린이날에도 생일에도 선물을 사주신 적은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대신 현금을 통장에 넣어주곤 하셨죠. 잔고를 보여주시며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저금해두면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 며칠 만지다 싫증 나는 그깟 장난감 부러워하지 말라고요. 아내 말대로라면 저는 울며 반발해야 했겠죠.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께 감사했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면 그때 저는 우리 집이 무척이나 가난한 줄 알고 있었거든요. 내가 원하는 걸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아내가 말하는 '마음의 그늘'이라는 게 그런 걸까요?
중학생이 돼서야 우리 집이 전혀 가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실은 친구들 집보다 훨씬 넉넉한 형편이었는데, 지나치게 근검절약하는 부모님 덕분에 무엇 하나 남들만큼 누려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은 거의 없었습니다. 졸업, 취직, 결혼 전부 제 힘으로 해냈습니다. 부모님은 늘 같은 말씀이셨죠. 다 너를 위해서 악착같이 모으는 거란다. 우리는 자식한테 짐이 되는 부모는 되지 않겠다는 그 마음뿐이란다. 부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면, 서운하기보다는 안타까웠습니다.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시고도 늘 전전긍긍, 이러다 길바닥에서 파지를 줍게 되지나 않을까 불안해하시니 말입니다. 그분들의 꽉 막힌 생각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자 다짐했었죠. 넉넉하고 여유로운 아빠가 되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는 지금 어린이날 선물 대신 현금을 넣어주고 싶은 아빠가 되어 있습니다. '실속'과 '가성비'를 따지며 이벤트의 분위기를 깨고, 아이들이 누리는 풍요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그런 아빠 말입니다. 유년 시절의 환경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넉넉한 부모가 되기를 꿈꿨지만, 저는 그런 부모님을 겪어보지 못했던 겁니다. 자식들을 바라볼 때도 각박한 세상을 혼자 견뎌낼 힘을 길러줘야 한다는 생각부터 드니 어쩌나요. 유년기의 영향을 못 벗어나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는 세상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딸 바보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지금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라고 하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생일 선물을 고르러 가던 예닐곱 살의 어느 날이 떠오른답니다. 그날 아버지는 그러셨답니다. 이 가게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예쁘고 비싼 것을 고르라고. 아버지의 그 말씀은 두고두고 아내의 마음에 따뜻한 등불이 되어준 모양입니다. 호기롭던 그날의 아버지가 실은 부자도 아니었고, 건강하지도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더….
아마 그래서인가 봅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한껏 행복한 추억을 심어주고 싶어 안달합니다. 1년에 하루쯤은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장난감을 고르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 마음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괜히 아이들 눈만 높여놓는 건 아닐지. 나중에 능력 없는 부모를 비웃게 만드는 건 아닐지….
어느새 포장 작업은 끝나 있습니다. 거실 탁자 위에 덩그러니 두 개의 선물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축하카드까지 얹혀 있습니다. 아빠의 메시지를 쓰려고 카드를 펼쳤습니다. 아내가 남겨놓은 동글동글한 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오늘은 두 형제 맘껏 뛰놀고, 맘껏 행복하라는…. 그 글을 읽는데 갑자기 먹먹해지더군요. 어린아이와도 같이 천진한 아내의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은 어쩌면 어른 속에 남아 있는 어린이를 위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선물을 주며, 아내는 아버지에게서 못다 받은 사랑을 받는 중인 모양입니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삭막했던 어린 시절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잠시 뒤, 나는 볼펜을 들고 한쪽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받고 싶은 선물을 적어보던 그 마음으로. 간절히,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습니다.
사랑한다 아들들아, 사랑해 여보.
부디 나도 많이 사랑해다오. 아들들아, 여보야.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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