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7.04 이명진 논설위원)
김대중 정부 시절 군과 검찰이 대대적으로 병역 비리 수사를 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수사였다.
군의관에게 돈 주고 자식 군 면제를 받아낸 부모들, 둘을 연결해준 브로커 등 수백 명이 적발됐다.
왕년의 병역 브로커 한 사람이 '전문가'를 자처하며 수사에 끼어들었다.
수사팀에 전화 걸어 "병역 비리 커넥션을 잘 알고 있다. 이 기회에 새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의무 부사관 출신 김대업씨였다. 사기 행각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면서도 1년 넘게 수사관 행세를 했다.
▶김씨가 유명 인물이 된 건 2002년 대선 때 야당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을 폭로하면서다. 모두 조작으로 드러났다.
녹음 테이프가 결정적 증거라고 했는데, 테이프는 '녹음 시점'보다 2년 뒤 생산된 제품이었다.
이게 들통나자 "배가 아프다"며 숨어버렸다.
당시 수사 검사가 "김씨는 거짓과 사실을 교묘하게 뒤섞어놓는 재주가 있었다"고 했다.
온 국민을 농락해 놓고도 "대선이란 전쟁터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중에 야당이 '사과하라'고 하자, 야당 당사로 사과 상자를 보낸 일도 있다.
▶그 김씨를 키워준 게 지금 여권과 언론, 검찰이다.
"강직한 의인" "대업을 이뤘다" "올해의 신인왕 후보"…. 사기꾼을 의인으로 떠받든 걸로 모자라 사면까지 해주려 했다.
TV 방송은 대선 기간 김씨의 거짓말을 101건이나 대서특필했다.
그 방송 관계자가 "광적(狂的)으로 방송했다"고 할 정도였다.
검찰은 '김씨 배후'와 관련한 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덮어버리고, '테이프 조작'을 밝혀낸 검사를 한직으로 쫓아냈다.
국가 공권력과 언론이 아니라 사냥개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필리핀에서 떠돌던 김씨가 엊그제 현지에서 붙잡혔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는데 온갖 사칭 범죄로 수사받다 3년 전 검사까지 속여 해외로 내뺐다고 한다.
붙잡혀 찍힌 사진을 보니 '의인'은 온데간데없고 영락없는 병자(病者) 모습이다.
가진 돈은 사기당해 다 털리고, 혼자 힘으로 거동도 못 한다고 한다. 업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파스칼은 인간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김씨를 떠받들던 사람들은 후자(後者) 쪽일 것이다.
선거 철이나 무슨 의혹 사건 때 등장해 사기를 친 가짜 의인이 김대업뿐인가.
지금도 얼마나 많은가. 그 가면은 결국 벗겨지지만 당한 사람들은 피해를 회복할 길이 없다.
'時事論壇 > 橫設竪設' 카테고리의 다른 글
7남매 엄마 '유럽 대통령'[횡설수설/신연수] (0) | 2019.07.06 |
---|---|
[만물상] 청구권과 '사법 농단' (0) | 2019.07.05 |
[태평로] 1996년의 신한국당, 2020년의 민주당 (0) | 2019.07.04 |
[이정민의 시선] 도쿄를 떠나며 (0) | 2019.07.02 |
[만물상] 경제 보복 (0) | 2019.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