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6.26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애꿎게 당한 순흥 안씨, 목잘린 오백나한 닮고 멸문될 뻔한 광산 이씨, 송강 정철에 恨 서려
'모반'이란 올가미 대신 작금엔 '적폐'란 낙인! 윤.석.열이란 날선 칼… 충성 대신 사람 살려야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아쉽게 막을 내린 강원도 영월 창령사(蒼嶺寺) 터에서 발굴된
오백나한(五百羅漢·사진) 전시는 나 자신 네 번이나 같은 전시를 보고도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을
떨쳐내지 못할 만큼 묘한 매력이 있는 전시였다. 아마도 그것은 전시된 나한상(羅漢像)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거나 적어도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볼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실제로 전시를 보면서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나한상을 발견했다는 이들도 적잖았다.
# 그런데 이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오백나한상은 지난 2001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될 당시엔
거의 목이 쳐진 상태였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오백나한의 목을 쳤을까?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시대 흐름에 기인한 것이었을까?
제 아무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라 해도 오백나한의 목을 쳐서 땅에 묻고 불까지 질러야 할 만큼
지독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일은 모반(謀反) 사건과 관련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상의 목이 쳐진 까닭이 다른 무엇보다 단종애사(端宗哀史)와 깊이 관련된 것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봤다.
#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폐됐다.
그해 9월 순흥에 위리안치됐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꾀했다가 발각되자 단종은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됐다.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아 사사(賜死) 되었고 이보흠은 참살당했다.
단종 역시 그해 10월 최후를 맞았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흥 안씨들이 학살 수준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그들 중에는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단지 수발을 들거나 같은 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이 더 많았다. 역사는 이를 1457년 정축년의 변고라 하여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일컫는다.
그 순흥 안씨들의 죄 없는 피가 순흥부를 휘감아 흐르는 죽계천을 혈천(血川)으로 만들며 십여 리를 더 흘러가
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을 '피끝마을'이라 부른다.
그뿐만 아니라, "한수 이북은 개경이요, 한수 이남은 순흥"이라 할 만큼 융성했던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또한 폐지돼
이리저리 찟기고 그 이름만 풍기 아래의 작은 고을로 남게 됐다. 지금은 영주시 순흥면이다.
#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됐다 하여 순흥 안씨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순흥도호부가 짜개져 일개 읍면으로 전락한 것과 같이, 아마도 누군가 몰래
영월의 창령사에서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제(祭)를 지내다가 발각되자,
절이 폐사되고 함께 모셨던 오백나한상 역시 목이 잘리는 훼불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을 죽여 그 피로 혈천이 되게 하고 피끝마을이 생길 정도였으니
오백나한상의 목을 쳐서 땅에 묻고 불을 지르는 것이야 무슨 대수였으랴.
허나, 수발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곤욕을 치르고, 추모하며 제를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입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 일 년 전쯤 국립광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송광사 성보박물관 관장인 고경 스님과 함께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자이자 예문관 제학이었던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의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필문의 후손인 광산(光山) 이씨(李氏) 한 분도 자리를 함께했다.
묘지명을 본 후 차담을 나누던 중에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담양 인근에 있는
가사문학관 앞을 지날 때마다 폭파해버리고 싶은 심경이라고 말했다.
가사문학관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전시실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광산 이씨 그분의 핏발 선 말은 송강 정철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주도해 자신의 조상인 이발(李潑)을 포함해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사백삼십 년 묵은 울분의 토로였다.
기축옥사란 1589년 기축년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이에 연루된 동인계(東人系) 1000여명이
3년여에 걸쳐 모진 고문을 받아 죽거나 화를 입은 희대의 사건이다. 필문의 5대손인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결국 장살(杖殺)되었다.
그의 노모, 형제, 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恨)이 서리지 않을 수 없을 일이다.
# 물론 우리는 왕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 전개된 일들을 보면 왕조 시대의 옥사(獄事), 사화(士禍)와 진배없어 보인다.
한때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네 명의 전직 국정원장, 그리고 전직 대법원장과 대통령 비서실장 및 부총리가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동시에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왕조 시대의 '모반' '역모'라는 말의 위력을 작금에는 '적폐'라는 낙인 한마디가 대신하고 있다.
그 적폐 청산의 칼을 치켜든 이의 상징이 다름 아닌 윤.석.열 검사다.
사백삼십 년 전 송강 정철이 휘두르던 칼 자리에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어른거린다.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윤석열은 그만큼 '쎄다'! 그래서 모두 윤석열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내가 만나본 전직 검찰총장마저도 그랬다. 하물며 나 같은 일개 서생(書生)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쓰는 것은 그래도 그에게 인간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남긴 한마디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끝까지 붙들려고 한다.
그래서 정녕 사람과 당파에 좌우되지 않는 검찰총장을 보고 싶다.
더불어 조직만이 아니라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통 큰 검찰총장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끝내 그에게서 강직하나 온화한 나한상의 얼굴을 찾고 싶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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