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동체’ 주례사는 이제 그만
성장배경 차이로 二心 불가피
다름 극복 시도 대신 인정해야
DJ 전 대통령 부부가 모범 사례
최근 지인 자녀 결혼식에 갔다가 모처럼 주례사를 주의깊게 들어봤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 급격히 확산되는 요즘 ‘살아남은’ 주례사가 어떤지 궁금해서였다. “부부 일심동체이기에 두 사람은 오늘부터 매사 한마음 한뜻이 돼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양보하는 자세로 맞춰나가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래전 내가 결혼할 당시 흔하디흔했던 주례사 멘트와 똑같음에 새삼 놀랐다. 배우자 부모를 내 부모라 생각하고 정성들여 효도하라, 힘들더라도 아이는 둘 정도 낳는 게 좋다는 말까지 판박이였다.
30년 세월이 짧지 않건만 아직도 부부 일심동체를 강조하는 게 신기하게 들렸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임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지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부부가 일심동체인지, 일심동체여야 하는지, 이심이체인지, 이심이체여야 하는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고 일심동체란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이 성장 배경의 차이로 사고방식이나 언어, 행동 등 모든 점에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그레이의 진단은 당연하지만 탁월하다. 남녀 간 성격 차이를 강조하며 남자를 고무줄, 여자를 파도에 비유한 것도 기발한 분석이다. 화성에서 자란 남자와 금성에서 성장한 여자가 지구에서 만나 불타는 사랑을 나눌지언정 완전히 일심, 그리고 동체가 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부부는 본질적으로 이심이체이며, 굳이 일심동체일 필요도 없다. 일심동체는 긴 생을 살면서 목표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럴진대 결혼 초기부터 배우자를 자기한테 맞추기 위해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건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앞세워 결혼을 하더라도 두 사람은 여전히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독특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부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심동체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 양보나 희생을 강요하는 말일 수 있다. 과거 우리네 남성 중심 유교문화가 일심동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는 분석은 일리가 있다. 아내는 매사 무조건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여필종부(女必從夫)를 좋은 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구순 맞은 내 장모님은 여필종부의 전형이다. 장인어른의 생각과 행동을 무조건 지지한다. 그래서인지 두 분 금슬은 더 없이 좋다. 이 경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요즘 세상에 이런 부부 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남편이든 아내든 배우자에게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한들 따를 리 만무하다. 강요하면 불화만 생길 뿐이다.
결국 이 시대 부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걸 당연하게, 그리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싶다. 송혜교-송중기 커플 파경과 관련, 송혜교 소속사는 입장문에서 “둘이 다름을 극복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다름을 극복하고자 어떤 노력을 했는지, 왜 극복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글을 보면서 부부 이심이체라는 내 판단이 옳다면, 다름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조금 부족하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는 이심이체임을 인정함으로써 아름다운 가정을 꾸민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측근 정치인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는 각자 독립된 인격체임을 중시해 평생 서로 존경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결혼 초기부터 서울 동교동 집에 문패 두개를 나란히 걸었다는 사실이 그걸 상징한다. 종교가 달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톨릭, 이 여사는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는데 이심이체임을 인정한 덕분 아닐까 싶다. 나도 30년 결혼생활에 부부싸움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지점에서 그 이유를 찾곤 한다.
며칠 전 후배 기자로부터 ‘여름날의 결혼식’이라 적힌 예쁜 청첩장을 받았다. ‘인사말씀’에 “우연이 겹쳐 인연이 되고 인연이 쌓여 운명이 됐습니다. 이제 그 만남의 결실을 맺고자 합니다. 두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봐온 분들과 더불어 그 기쁨을 나누려 합니다”라고 적혀있다. 같은 직장 다니면서도 사적인 만남을 거의 하지 못해 가까이서 지켜보진 못했지만 덕담이라도 한마디 부탁하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임이 분명하다. 너희 둘은 직업이 기자란 것 빼고는 같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진실로 사랑하기에 결혼하겠지만 상대를 사랑하는 수준과 방법까지 포함해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이럴 때 다름을 극복하려하기보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빨리 극복해야겠다는 욕심에 다름을 일치시키려다 어려움을 겪는 부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고무줄이 파도를 만났으니 필시 아내의 심리적 변덕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 변덕스러우면 어떤가. 변덕과 업다운이 파도의 본질이란 사실을 얼른 깨닫고 세심하게 배려하면 신혼의 행복은 절로 오지 싶다. 여름날 저녁 웨딩마치에 큰 박수 보낸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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