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8.07 배준용 국제부 기자)
배준용 국제부 기자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실질 GDP가 올해에만 35%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망대로라면 베네수엘라 경제 규모는 지난 6년 새 65% 줄어들게 된다.
전쟁, 자연재해를 겪지 않은 나라 중 이런 경제 파탄이 나타난 사례는 근현대사에서 찾기 어렵다.
1914년에 산유국이 된 베네수엘라는 한때 미국보다 경제 형편이 좋았다.
1930년대에는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의 가치가 달러를 앞지를 정도였다.
대공황 막바지인 1939년 6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거주하는 비용이
워싱턴 DC 거주 비용보다 비싸다"는 미 국무부 보고서를 받고서 '국무부가 계산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베네수엘라가 여전히 후진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최측근들에게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는데, 일주일 뒤 미 상무부 직원이었던 경제학자 윌러드 소프는
"카라카스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메모를 루스벨트에게 제출했다.
메모에 따르면 당시 카라카스에서 한 칸짜리 원룸에 하숙하려면 1년에 1740달러가 필요했는데, 워싱턴 DC에 사는
미 연방정부 공무원이 1년에 지출하는 거주 비용이 690달러였다.
소프는 "카라카스에서 집을 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최소 2~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소프는 또 "화장실 용품, 약값도 카라카스가 미국보다 75~200% 정도 비쌉니다.
카라카스에서 파는 여성 의류는 전부 수입품인데, 미국보다 200% 비싸게 팔리고 있습니다"라고도 적었다.
당시 카라카스는 '석유 대박' 덕분에 휘황찬란한 대도시로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한테
정부가 돈을 마구 뿌려대도 아무 문제가 없던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 신화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베네수엘라의 저명한 외교관이자 전 석유장관 페레스 알폰소
(1903~1979)는 생전에 이런 광경을 보며 "석유는 악마의 똥"이라고 말했다.
석유로 번 돈에 기대어 누구도 일하려 하지 않고, 기업은 정부 지원금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며 한 말이다.
그는 한 기고문에서 "10년 뒤, 20년이 지난 뒤에… 두고 봐라.
언젠가 석유는 베네수엘라에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국을 걱정한 알폰소의 말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수십 년 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은
좌파 포퓰리즘으로 '오일 달러'를 탕진해 그의 우려를 현실로 만들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경제난을 피해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국민은 총 500만명을 넘어설 예정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쓴소리'를 외면한 대가는 이렇게 혹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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