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줌 흙이 태산이 된 교훈
한국일보 2019.08.09. 18:02
대일 경제전쟁 속 모호해진 ‘친일파’ 정의
‘관작 남용’ 비판에도 선조는 이순신 등용
국난에도 편가르기 뛰어넘지 못한 개각
우리에게는 ‘적폐’가 나라를 구한 역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증거다. 선조가 1591년 2월13일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을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고 하자, 대간들이 들고 일어섰다. ‘현감(종6품)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정3품)에 초수(招授)하시니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遞差ㆍ교체) 시키소서.’ 단번에 7등급을 뛰어넘는 승진은 ‘적폐’라는 게 신하들의 반대 논리였다. 그런데 우리가 ‘암군’(暗君)으로 여기는 선조는 의외로 이렇게 맞선다.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요즘 한반도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왕적폐’로 통하는 재벌이 한일 갈등과 미국의 안보 압박 상황에서 정부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정부ㆍ여당이 당장은 효과 없는 장기ㆍ감정적 대책을 쏟아낼 동안 전선을 맡고 있는 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다.
정부는 ‘트럼프ㆍ김정은’ 브로맨스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고 여기지만 사실과 다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부터 전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완패 직전이던 당시 트럼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스티브 배넌이 증인이다.
배넌은 지난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와의 인터뷰에서 “대북 군사 해법은 없다. (개전 후) 30분 내에 1,000만 명이 죽지 않도록 하는 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한 그 문제를 얘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정권 초기부터 군사적 응징 계획은 없었고,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발언은 전형적 과장법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정권이 대북 공격을 애초에 배제한 건 25년 전 ‘1차 북핵 위기’ 때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공습을 준비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판단의 이유는 뭘까.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과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했듯 5,000만명이 모여 사는 10만㎢ 땅에 세계 경제를 좌우할 것이 25년간 너무 많아졌다. 이른바 ‘재벌ㆍ친일세력’이 곳곳에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공장을 지은 덕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글로벌 부가가치’ 사슬이 끊기면 청와대 주장처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
3년 적폐청산 작업 표적이 ‘친일파’로 옮아가는 와중에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터지면서 도리어 친일의 정의가 모호해지고 있다. 정파마다 상대를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생존이 절박했던 압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종북ㆍ빨갱이’ 역사를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친일ㆍ부역’의 역사도 두부 자르듯 가릴 수 없는 게 분명해졌다. 보수 진영이 ‘북한 대변인’으로 몰아세우는 문 대통령까지 급기야 이 논란에 휩싸였고, 친일파의 상징으로 욕먹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김정일에게 정중한 안부편지를 보낸 친북의 과거가 있다.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했던 ‘애매한 걸 정해주는 남자’, 즉 ‘애정남’이 그리울 정도다. 그 코너가 아직 있었다면 “싸우면 적폐고 뭉치면 우리 편입니다. 편가르지 말고 실력을 기릅시다”라고 했을 것 같다.
사실 인류 역사의 업적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은 내가 수많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나라 시황제도 “태산은 한줌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를 사양하지 않아 깊음을 이뤘다”는 참모(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절적 사고로 종북ㆍ친일로 나눠 싸우기에는 외교ㆍ안보ㆍ경제적으로 너무 위태한 국면이다. 꽤 많은 이들이 고사했다는 말도 들리지만, 이번 개각에서도 문 대통령이 선조의 적폐 등용을 재연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조철환ㆍ뉴스3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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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文정권의 '내 맘대로 한다'.. 도 넘었다
동아일보 2019.08.09. 03:02
"남북경협으로 日 따라잡겠다" 황당해도
'원하는 것 하겠다'에 靑내부 苦言 못해
총선 노린 민족 드라이브 자충수 될 수도
노무현 정부 당시 문재인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이 사석에서 한 얘기다. 청와대의 위기 상황에 대한 얘기 끝에 나온 말이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이 반론을 펴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최종적으론 자기 생각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 문재인 비서관은 그런 점에선 조금 철학이 달랐던 것 같다.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3개월간 정말로 ‘끝까지 신념을 밀고 가는’ 대통령을 목도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누가 뭐라든 내 뜻대로 한다’가 트레이드마크다.
결국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에 임명할 것이라 하니, 문 대통령의 소신은 역대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다. 법무장관은 이념·정치적 중립성, 객관성, 권위와 신중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리인데, 우리 사회 이념 스펙트럼에서 한쪽의 거의 끝부분에 서 있는 인사를 기어코 써야겠다는 것이다.
조 전 수석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최근 검찰 간부 인사는 ‘내 맘대로 한다’가 대통령 측근들도 공유하는 특질임을 보여준다. 정권이 싫어하는 수사에 관여한 검사들을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무더기로 좌천시킨 전례는 찾기 힘들다.
과거 정권들은 아무리 내부적으로 곪고 독재를 해도, 여론과 야당의 시선을 의식해 원하는 게 100이면 80 안팎만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정권은 거의 100% 관철하려 하는 게 특징이다.
이는 사회를 선악 이분법으로 나눠, 자신의 반대론자를 악의 위치에 놓는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비판세력의 눈은 의식할 가치가 없다고 마음먹은 결과다. ‘명분, 신념, 결집된 지지세력’이라는 삼위일체만 있으면 돌파하지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필연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 하겠다’로 이어진다.
“남북 경제협력으로 평화 경제가 실현된다면 단숨에 일본 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데 이는 위험한 징후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청와대의 시스템 장애다. 즉흥적 발언이 아니었는데 참모들은 사전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정치인인 대통령의 관점을 외교·경제·전략 보좌진이 걸러줘야 했는데 아무도 그런 말을 못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는 정권 내 길항 기능의 마비를 뜻한다. 최고 통치자가 좀처럼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참모들은 점차 고언을 포기하게 된다. 대통령의 발언 후 현직 장관급 인사마저 지인들에게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입 밖에 내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두 번째 징후는 1980년대 민족해방계열(NL) 시각의 부활 조짐이다. NL은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분단으로 봤고, 주적은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미국 일본 등이고 극복 주체는 민족으로 봤다.
세 번째 위험한 징후는 총선과 재집권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드라이브의 과열이다. 논리적 설득력만 염두에 뒀다면 문 대통령도 그런 발언을 안 했을 것이다.
남북경협이 일본을 이겨낼 동력이 될 만큼 이뤄지려면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완비되어야 하는데 최소한 수년 이상 걸리는 작업이다. 극복해야 할 문제와 대안 간에 시간적 격차가 너무 크다. 당장 수돗물이 안 나오는데 황허 강물을 끌어오면 된다고 하는 격이다.
극일은 시간이 걸린다. 일본이 수십, 수백 년 쌓아올린 기초과학 연구개발을 우리는 새로 투자하는 건데, 정부가 집중 지원하면 시간이 단축은 되겠지만 기술 특허가 독점화되어있는 부분을 국산화한다는 게 간단치는 않을 것이다. 부품·소재 국산화를 해도 경쟁력을 가져야 자생할 수 있다. 방위산업이 아닌 모든 부품·소재·장비를 국가예산으로 상용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많은 기업들이 엄청난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지만 친일 매도 분위기에 눌려 내놓고 말은 못 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낱낱의 사실관계는 어쩌면 청와대에겐 무의미할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국민 일반이라기 보다 핵심 지지층을 겨냥해 장기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분단모순을 극복해 하나 된 한반도의 힘으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수십 년전 이상론의 21세기판인 것이다.
집권세력은 민족주의 드라이브가 남북관계 이벤트와 맞물린다면 총선·재집권의 특효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정략적 확신과 그것이 대의라는 주관적 신념이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비전은 몽상과 다르다. 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주변국 관계, 세계정세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동방정책의 주역인 서독의 빌리 브란트는 1957년 서베를린시장 시절부터 참모인 에곤 바르와 발언 하나하나를 협의하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일관되면서도 신중한 메시지가 수십 년 쌓여 훗날 독일 통일이라는 열매로 이어진 것이다.
열광하는 지지층만 바라보며 신념과 명분으로 무장한 채 마이 웨이 하는 현상을 과거 정권들에서 여러 번 목도했는데, 그 결말은 비슷했다. 최근엔 박근혜 정권의 2016년 4·13총선 공천파동이 한 사례다. 대통령의 독선은 총선 참패를 불렀고 탄핵으로 이어졌다. 대통령발(發) 뉴스에 평범한 사람들마저 “어”하며 어이없어하는 현상,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적신호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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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조국 강경화 정경두, '내 맘대로 한다'는 대통령
조선일보 2019.08.10. 03:15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에 지명하는 등 장관 4명과 장관급 6명을 교체했다. 반대가 많았지만 조 법무장관 지명을 강행하고, 경질 요구가 많았던 외교·국방 장관은 유임시켰다. 교체돼 나간 장관들은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라고 한다. 개각이 대통령의 국정 쇄신이 아니라 측근들 돌려막기와 선거용이다. 경제 위기와 한·일 갈등, 미·중 패권 경쟁, 북핵 교착 등 나라 안팎 복합 위기에 대한 우려는 어느 때보다 큰데 대통령은 '누가 뭐라든 내 맘대로 한다'는 오기와 독선뿐이다.
조 후보자는 거듭된 인사 참사와 청와대 불법 사찰 의혹의 책임자다. 공무원들 휴대폰을 무더기로 털어 인권을 유린하기도 했다. 앞장서 추진해 온 고위 공직자 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은 여당 내에서조차 반발을 사고 있다. 문책받아 마땅한 사람이 장관으로 영전한다. 조 후보자는 교수 시절 정치권으로 간 동료 교수를 '폴리페서'라고 공격하더니 자신에 대해선 "앙가주망(현실 참여)"이라고 한다. 잇단 휴직으로 학생에게 피해가 돌아가는데도 "법률과 학칙에 따른 행위"라고만 했다.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태극기 부대 수준의 집단"이라고 했다. 서울대 학생 등의 '부끄러운 동문' 투표에서 조 후보자가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에 대한 학내·외의 평가를 보여준다.
조 후보자의 정치적 편향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친일파'라거나 '구역질 난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총선을 8개월여 앞두고 검찰 등 사법기관을 총괄하는 법무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과거 이명박 정부가 총선 1년 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으로 지명했을 때 민주당은 "정치 검찰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최악의 측근 인사, 회전문 인사"라고 비난했었다.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군사독재 시절에도 차마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똑같은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쳐다보는 국민이 두렵지 않은가.
지금 국민들은 다른 나라와 외교장관 회담을 하는 강경화 장관을 보면서 어떤 신뢰감도 갖지 못한다. 외교장관이란 직함을 갖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아무 권한도 능력도 없는 '인형'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북핵 폐기는 실종됐고, 미국 대통령은 '북한 미사일이 한국을 겨냥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일본은 무역 보복 중이고, 중국·러시아는 우리 영공을 넘나든다. 사방이 다 막힌 총체적 외교 난국인데 허울뿐인 외교장관을 유임시킨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란 뜻인가.
북 목선 사태와 가짜 범인 조작 등 심각한 군 기강 해이의 책임을 물어 국회에 해임안이 제출됐던 국방장관을 유임시킨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국무총리는 국회에 나와 "(외교·국방장관 교체를) 청와대와 상의하겠다"고 했었다. 국무총리도 외교·국방장관의 경질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결정은 정반대였다. '내 맘대로 한다'에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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