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1.29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골목·마당 교묘히 경계 짓는 하회마을 낮은 담장
남의 집 마당 위 하늘도 빌려 즐기는 건축 장치
中景 지우고 遠景·近景 살리는 독특한 기법 연출
조상들, 먼 곳 경치 빌린다 해서 '借景'이라 불러
담장 금지한 新도시엔 군사요새 같은 주택 양산
주택가 담장 살려 우리만의 도시 경관 만들어야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골목길을 걸으면서 낮은 담장 너머의 하늘과 나뭇가지를 보게 된다.
담장은 공적 공간인 골목길과 사적 공간인 마당을 교묘하게 경계 짓는 장치다.
실제로 담장 너머 집은 잘 보이지 않지만, 대신 남의 집 마당 위 하늘은 내가 빌려서 즐길 수 있는
나눔의 미학이 숨겨진 건축 장치다.
낮은 담장은 건축의 초기 시작되었다가 농업 사회에서 완성된 건축 장치다.
최초의 담장은 가장 오래된 건축 유적인 '괴베클리테페'에서 나타난다.
이 건축물은 수렵 채집을 막 벗어나려는 인류가 만든 건축물이다.
장례식을 치르는 곳인 이 건축물은 지붕도 없이 동그랗게 둘러싼 담장이 전부다.
그리고 그 안에 돌기둥을 몇 개 세워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담장으로 외부와 구분된 성스러운 내부를 만들고 있는 최초의 건축이다.
인류의 건축은 담장에서 시작
이처럼 건축은 담장에서 시작했다. 이후 담장은 농업 사회에서 더욱 발달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달했는데, 그 이유는 온돌에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온돌 때문에 건물을 단층으로 지어야 했다. 단층을 지으니 건물이 낮고 넓게 깔리게 된다.
목구조여서 폭이 넓은 건물을 짓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방이 필요하면 별채로 짓는 구조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좁고 긴 건물 여러 채가 있는 구조가 되었고,
흩어진 건물들 사이에 외부 공간인 마당이 많은 공간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구조가 되면 외부인들이 마당으로 들어오기 쉬운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담장을 주변에 둘러쌓았다.
담장을 높이 만들면 공사비도 많이 들고,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땅이 물러져서 담장이 쓰러지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담장은 최소한 높이로 해서 영역을 구획했다.
그렇게 만든 독특한 공간 구조가 안동 하회마을 같은 오래된 마을의 낮은 담장과 골목길의 정취다.
이러한 정취는 70년대 2층 양옥집을 짓던 시절까지도 지속되었다.
도심에 마당이 있는 집들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밀집했다.
사람들은 담장이 구획한 또 다른 공간인 중간의 골목길에서 만나고 머무르고 이야기하고 뛰놀았다.
자동차가 골목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았다.
/일러스트=박상훈
건축적으로 낮은 담장은 중경을 지우고 원경과 근경을 가지고 오는 독특한 기법을 연출한다.
조상들은 이런 기법을 먼 곳의 경치를 빌린다고 해서 '차경(借景)'이라고 불렀다.
시청 앞 덕수궁의 묘미는 복잡한 도심에서 한 발자국만 안으로 들어가면 고즈넉한 궁궐의 적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담장 너머 도시를 구경할 수 있다. 그게 가능한 것은 덕수궁 담장 덕분이다.
담장이 중경인 정신없는 자동차의 풍경을 지우고 먼 산과 높은 빌딩만을 빌려 오는 차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덕수궁 담장이 없다면 덕수궁은 더 이상 덕수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덕수궁 담장을 허물자는 생각에 반대한다.
세종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궁을 구경할 수는 있겠지만, 덕수궁은 버킹엄궁이 아니다.
덕수궁을 덕수궁 되게 하는 데는 낮은 담장의 역할이 크다.
현대 도시 담장, 집단 이기주의 상징
이러한 '꽤 괜찮은' 낮은 담장을 미학적으로 현대 건축에서 가장 잘 표현한 건축가는 안도 다다오다.
그가 설계한 '물의 교회'를 보면 담장이 일을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교회 예배당은 5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ㄴ' 자 모양의 130m 길이 담장은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방문객이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자연과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최종적으로 예배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더 감동적이다.
그런데 현대 도시에서 담장은 집단 이기주의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남과 나를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담장은 분리의 상징이 되었다.
아파트 단지는 담장을 둘러쌓고 일반 시민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런 아파트 담장은 없어지는 게 맞는다.
하지만 아파트 담장과 주택 담장은 성격이 다르다.
한때 "우리도 미국의 교외 주택 단지처럼 마당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주거 지역을 만들자"면서 신도시에서는
담장을 금지했다. 그렇게 한 지 30년가량 지난 지금 우리나라 신도시에 가보면 담장은 없지만
대신 주택들이 요새처럼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대로변으로 등을 돌리고 2층짜리 건물 매스를 올리고 중정을 만들어 놓고 있다.
중정에 들어가서는 2층 높이로 둘러싸여서 여간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니다.
아파트는 1층을 필로티로 개방하면서 담장을 없애면 된다.
하지만 주택은 대로변에서 수m 이내에 거실이 보이게 되는 일이 생겨난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신도시 주택가가 미국 교외처럼 인구밀도가 낮은 곳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 길 가는 사람이 들여다보는 집을 원치 않는다.
미국의 교외 주택은 땅이 넓어서 사적인 외부 공간으로 뒷마당이 있기에 앞마당을 개방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군사 요새 같은 주택을 양산하느니 차라리 주택가에서는 담장을 허락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럴 때 오히려 길에서 주변 집의 마당 위 하늘과 나무를 빌려서 구경할 수 있는 경관도 나오고
우리나라 도시만의 독특한 경관이 될 것 같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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