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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58] 스푸트니크

바람아님 2014. 1. 18. 13:08

(출처-조선일보 2012.04.12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
서양근대사
냉전 시대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1957년 10월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려놓은 일이다. 소련의 과학 기술이 미국보다 앞서 나간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을 뿐 아니라, 당장 소련이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인공위성 개발은 미사일 및 핵무기 개발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 8월에 소련은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성공했고, 두 달 뒤 이 미사일을 이용하여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제 이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미국 본토 공격 무기를 개발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핵무기는 미국이 처음 개발하였지만 1949년 가을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은 깨졌다. 이제 양국은 서로 상대방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려는 핵 경쟁에 돌입했다. 1950년 1월에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 개발을 명령했고, 1952년 말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700배의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그러나 1953년 8월 8일에 소련도 수소폭탄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핵 문제는 이 시대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미디어들은 핵전쟁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제시했다. 핵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100명 중 97명은 살아남으며 따라서 핵전쟁은 그런대로 해볼 만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1961년에 3000메가톤급의 핵폭탄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인의 80%가 사망한다고 추산하는 보고서가 나온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흐루쇼프는 미사일과 핵무기로 세계의 주요 도시들을 파괴할 수 있다며 서방 세계를 협박했다. 후일 존슨 정부의 부통령이 되는 휴버트 험프리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고향을 묻는 질문에 험프리가 미니애폴리스라고 답하자 흐루쇼프는 지도에서 그 지역을 찾아 동그라미를 치더니 "우리 로켓이 공격할 때 이 도시는 남겨두겠소" 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사실 흐루쇼프는 실제 그들이 보유한 핵무기 개수나 기술 수준을 과장하여 서방 세계를 위협하곤 했다.

북한의 위성(혹은 미사일) 발사는 스푸트니크 당시와 흡사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제 남북관계는 한층 더 복잡 미묘한 단계로 진입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