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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157] 국왕의 死體

바람아님 2014. 1. 17. 09:50

(출처-조선일보 2012.04.04 )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국왕이 죽으면 사인을 명백히 규명하는 검시 과정을 거친 후 방부처리를 하여 미라를 만들었다. 사체의 방부처리 기술은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영국은 헨리 1세(재위 1100~1135), 프랑스는 필립 4세(재위 1285~1314)부터 공식 언급되었다. 국왕이 서거하면 혹시 다시 숨이 돌아올지 모르므로 24시간을 기다린 후에 궁정의 주요 인물들과 의대 학장이 입회한 가운데 검시를 시작했다. 왕실 수석 외과의가 흉골에서부터 치골까지 길게 절개하여 흉부와 복부를 열면 참여 의사들이 내장·위장·비장·간·심장 등 주요 장기들의 상태를 관찰한 후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방부처리 과정이 진행된다. 혀와 눈을 비롯하여 부패하기 쉬운 기관들을 제거하고, 정향·장미수·레몬·오렌지·안식향 등의 물질이 함유된 방향성 포도주로 사체를 씻은 다음, 면으로 입·눈·코·귀를 막고 왁스 입힌 천으로 싼다. 사체에서 나는 냄새는 잘못 맡으면 즉사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각종 방향제를 사용했다. 사이프러스 껍질·라벤더·로즈마리·소금·후추·압생트·몰약·정향 등 여러 물질을 몸 안에 채워넣은 후 사체를 봉합하였다. 적출한 내장들, 혈액, 지방 그리고 수술 중 사용한 스펀지 등은 모두 수거하여 통에 넣어 관 옆에 함께 두었다. 이때 중요한 기관인 심장은 따로 방부처리를 했다.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하는 데에는 국왕의 신체가 개인의 몸인 동시에 '국가기관'으로서 신성한 가치를 지니고, 그래서 국가 기념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대의 관념이 작용했다. 반쯤 미라가 된 국왕의 사체는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 프랑스 왕실 성당인 생 드니 성당에 안치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 중에 국왕 사체를 훼손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혁명이 가장 과격한 단계에 들어섰던 1793년 가을, 혁명 당국은 지난 시대 왕정의 신성함을 공격하기 위해 역대 국왕의 관을 꺼내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앙리 4세 사체의 경우 당대 기록은 이렇게 증언한다. "잘 보존된 국왕의 사체는 아주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월요일까지 사체를 공개하여 누구든지 와서 관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병사 한 명은 수염 몇 올을 뽑아 기념물로 삼았다."

왕이든 범부든 죽으면 그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다. 순리에 맞지 않게 사체를 억지로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는 일은 봉건 왕정 체제에서나 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