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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56] 페르미의 역설

바람아님 2014. 1. 16. 11:56

(출처-조선일보 2012.03.28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940년대의 어느 날,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페르미가 동료 학자들과 지구 바깥에 지적인 생물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은하계에 별이 1000억 개나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쯤 지적 생명체가 은하계에 널리 퍼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여태 그런 지적 생명체가 지구에 찾아오지 않았을까? 이 수수께끼가 페르미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

혹자는 지구를 찾아올 정도의 과학기술 능력을 갖춘 생명체라면 원자폭탄 같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무기로 서로 공격하며 자멸하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을 제시했다. 
반면 저명한 진화심리학자인 제프리 밀러는 그런 지적 생명체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지구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농담 같은 이야기 뒤에는 사실 매우 진지한 고찰이 숨어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구했고, 똑똑하고 건강한 자식을 얻기 위해 매력적인 짝을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맛있는 음식 대신 패스트푸드를 찾고, 매력적인 짝을 찾는 대신 포르노가 성행한다. 
고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이후 사람들은 '간접적인 신호'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곧 자연에 대한 통제와 지배의 강화를 뜻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장과 착각의 기술 역시 발전시켰다. 
우주 탐험을 직접 하기보다는 '스타워즈'를 찍어 은하계를 지배하는 흉내를 내고, 자연 속에서 노닐기보다는 가상현실의 세계를 무대로 한 게임에 몰두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나머지 이제는 아예 가상의 자연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자연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셈이다. 
19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발명이 자동차·비행기·전등 등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현실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21세기에 중요한 발명은 가상현실의 오락산업을 위한 것들이다. 
오늘날 대학에서 중도 하차하는 사람 중 다수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육체와 정신이 심하게 훼손당한 소위 폐인들이다.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피해도 막대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컴퓨터 오락에 몰입하는 것이 장차 더 큰 문제가 될지 모른다. 멋진 생(生)의 즐거움 대신 쉽고 단순한 기계적 오락의 거대한 유혹이 사회를 덮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나르시시즘적인 폐인으로 만드는 현대의 새로운 역설에 맞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주는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