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가슴으로 읽는 한시 - 꽃씨

바람아님 2014. 4. 1. 11:50

(출처-조선일보 2014.03.03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꽃씨                                 題錫汝壁


만 리 넘어 가지고 온            萬里携來春一囊

한 주머니 봄소식                (만리휴래춘일낭)


시인의 가벼운 짐에는            騷人輕橐爛生光

생기의 빛이 찬란하네.          (소인경탁란생광)


북경 성의 나비들은              燕城蛺蝶魂應斷

넋이 온통 빠졌겠네.            (연성협접혼응단)


동풍 불면 불어올 향내           失却東風幾斛香

몇 말이나 줄었을 테니.         (실각동풍기곡향)


-이정주(李廷柱)

[가슴으로 읽는 한시] 꽃씨
/정인성
19세기 여항(閭巷) 시인 몽관(夢觀) 이정주(李廷柱·1778~1853)의 작품이다. 친구가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 인사를 하러 친구 집을 들렀더니 짐 보따리에 들어있는 것은 꽃씨 한 주머니뿐. 가기 힘든 곳을 가서 남들처럼 고가의 사치품을 마구잡이로 가져오는 대신 꽃씨를 가져왔다. 저속한 사람이라면 바보라고 비웃겠지만 시인은 그의 무욕과 멋스러움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벽 위에 시를 써놓고 왔다. 만 리 길 되돌아온 친구의 가벼운 짐 보따리에서는 생기가 넘쳐흐른다. 봄꽃을 피울 꽃씨가 가득 들어 있어 그 광채가 벌써 느껴진다. 봄바람이 불면 북경에서는 꽃향기가 많이 사라져 나비들은 넋이 빠질 만큼 슬픔에 잠기리라. 대신 조선 땅 한양의 나비들은 꽃향기에 취해 훨훨 날겠지. 온 마을을 꽃향기로 채운 친구야말로 진정한 부자요 사치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