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5. 1. 21. 00:07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초상화다. 위엄 서린 황룡포가 무색하게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아 잡고 섰다. 1898~1899년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화가 휘베르트 보스(Hubert Vos·1855~1935)가 직접 황제를 앞에 두고 그린 것이다. 보스는 로마와 파리에서 수학하고, 런던에서 초상화가로 입지를 굳힌 뒤, 1893년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관했다. 시카고에서 그가 눈여겨본 건 아메리카 원주민, 이집트인과 에스키모 등 비서구권의 이국적인 여러 종족을 한데 모아 전시한 ‘인류학’ 부문이었다. 보스는 이토록 다양한 인종이 사라지기 전에 그 모습을 기록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길을 떠나 하와이,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중국을 두루 다녔다.
조선에서 왕의 초상이란 제의에 사용되는 국가의 상징이지, 이처럼 만인 앞에 전시되는 미술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온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앞서 서양인이 들고 온 카메라 앞에 서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낯선 벽안(碧眼)의 화가 또한 경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1899년, 화가와 함께 이 초상이 궁을 떠날 때, 신하들은 마치 고종의 몸을 떼어가는 것처럼 여겼다고 전해지니, 모두가 서양화법의 사실성에 감탄했던 모양이다.
보스는 이후 청나라 서태후 초상까지 그려 들고 돌아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다양한 인종 유형’으로 전시했다. 일국의 군주에 대한 일말의 존중이 없는 이런 상황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당시 서양인의 눈에는 대한제국이든 청나라든 그저 몰락한 변방의 부족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승하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https://v.daum.net/v/2025012100070620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66] 고종 황제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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