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03.21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는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는 돈 잘 쓰고 친구와 잘 어울리며 흥겹게 지내는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로
살았다. 그러나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 또 고향에 돌아와서 큰 병을
앓고 난 후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 한량생활을 하던 때와 달리 갑자기 과묵해진 그를 보고
친구들이 놀리며 여자 생각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프란치스코는 "물론이지, 자네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주 멋진 여인과 결혼하려고 한다네"하고 답했다.
그가 평생 같이하려는 신부는 다름 아닌 '가난이라는 귀부인'이었다.
시골의 한 작은 성당의 예수 성상이 그에게 "프란치스코야, 내 집이 무너지고 있으니 고쳐 주렴"하고
말하는 환상을 경험하고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돈을 가져다가 기부했다.
아버지가 그를 심하게 나무라자 그는 아예 집을 떠나 본격적인 걸인 행각에 나섰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 10:8-10)
그는 누더기 옷에 맨발로 설교를 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사제가 아닌데 설교를 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인 셈이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직접 교황을 찾아가 새로운 수도회를 만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카잔차키스는 그의 소설 '성 프란치스코'에서 지독한 발 냄새가 나는 노숙자 행색의 프란치스코가 교황을 만나는 장면을
성스럽게 그린 바 있다.
교황으로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수십 년 전에 거의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리옹의 빈자'라 불리는 왈도라는 인물이 부자로 잘살다가 어느 날 각성하여 모든 재산을 내던지고는 교황 앞에 나타나 설교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올바른 신앙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설득하여 돌려보내자 왈도는 현 교황은 말세의 적그리스도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녔다.
왈도파는 중세 최대의 이단 종파로 커졌다. 애초에 이단의 수괴와 성인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자의 이름으로 교황이 즉위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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