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3) 봄날의 과부

바람아님 2014. 7. 1. 12:21

(출처-서울신문 2008-03-31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신윤복의 그림 ‘봄날의 과부’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그림을 기법 차원에서만

독해한다면 그림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사실 이 그림은 사회사적 독해를 요한다. 

먼저 그림부터 꼼꼼히 챙겨 보자.

이 그림이 만들어내고 있는 공간. 기와를 얹은 담장이 

에워싸고 있는 마당이다. 담장은 장방형의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덮었으니, 예사 집이 아니다. 

권세 깨나 있고 돈 좀 주무르는 그런 집안이 분명하다. 

그림 왼쪽 상단에는 담장 너머 흰 꽃, 붉은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배나무 꽃인가, 벚나무 꽃인가, 배롱나무 꽃인가. 어쨌든 좋다. 

이런 꽃으로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윤복 ‘봄날의 과부’    간송미술관 소장


개의 짝짓기 그림에 담은 신윤복의 파천황적 발상


봄은 생명의 계절이고, 생식의 계절이다. 곧 봄은 생명을 잉태하는 계절인 것이다. 

하여 그림 아래 부분의 마당에서 개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림에 개의 짝짓기라니, 조선시대에 신윤복이 아니면 불가능한 파천황적파천황(破天荒-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냄을 이르는 말)인 발상이다. 

한데 짝짓기를 하는 것은 개만이 아니다. 개로부터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보면 참새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더 있어 파닥거린다. 바야흐로 봄은 짝짓기의 계절인 것이다. 

식물의 꽃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식물의 성기가 아닌가. 꽃이 피고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은 식물의 짝짓기 행위다.

생명력이 충만한 봄은 어디서 왔는가. 당연히 담장 밖에서 왔다. 담장을 넘어오는 붉고 푸른 꽃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봄은 개구멍에서도 온다. 개 두 마리는 바로 담장 아래의 개구멍으로 들어온 것이다. 

참새들이야 저 허공을 통해서 왔을 터이고. 그런데 담장 안은 어떤가. 

이제 시선을 오른쪽 두 여인네로 옮겨보자. 두 여자는 비스듬히 누운 나무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문제다. 나무는 소나무로되, 이미 꺾어진 소나무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래쪽의 빈약한 잎을 단 가지 둘뿐이다. 소나무는 죽어가고 있다. 집 밖은 생명력이 충만한 봄인데, 여기 돌담 안의 집은 죽어가고 있는 풍경이다.

이제 여자 둘을 보자. 오른쪽 여자는 삼회장저고리를 제대로 차려 입고 있고,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묶고 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귀한 집의 규수다. 왼쪽 여자는? 구름 같은 가체를 올리고 있는데, 옷은 모두 흰색, 즉 소복이다. 

이 여자는 결혼을 한 여자이고, 또 상중에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남편이 죽은 여인이다. 

왜 신윤복은 과부를 그림에 배치했는가 궁금하다.

여자 둘의 시선은 개의 짝짓기에 가 있다. 그런데 둘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처녀의 표정은 쌀쌀맞고 차갑고 무심하다. 

하지만 과부는 배시시 웃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눈치다. 과부의 웃음에 신윤복의 의도가 있다. 

신윤복은 과부의 소외된 성욕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 철저히 억압한 가부장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성은 젊어서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 재혼, 곧 개가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남편이 죽어도 여성은 개가, 삼가(三嫁)할 수 있었고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의 가부장적 윤리관은 여성의 재혼을 윤리적 타락으로 규정했다. 

성종 때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료하면서, 남성의 가부장제는 마침내 법으로 여성이 개가해서 낳은 자식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좋은 벼슬자리를 얻을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양반가의 여성은 사실상 재혼의 길이 막혔던 것이다. 

이런 조치와 함께 남성의 가부장제는 남편이 죽고도 재혼하지 않은 여성을 절부(節婦)라 부르고, 남편을 위해 자기 신체를 

자해하거나, 대신 죽거나, 남편이 죽었을 때 즉시 따라죽은 여성을 열녀라고 불러 정문을 내리는 등 사회적 명예를 부여하였다.

이런 정책이 강하게 추진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여성의 수절은 양반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졌다. 

양반 상인 할 것 없이 남편이 죽으면 예사로 수절하였고,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신윤복의 이 그림은 이런 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젊은 여성이 수절할 경우 그 내면의 성욕을 처리할 방법이 묘연하였다. 

조선조의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을 출산과 쾌락으로 분리하고, 후자를 음란함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남편이 죽은 뒤 홀로 

남은 여성의 성은 출산이 배제된 성이기에 쾌락만이 남았고, 그것은 자동적으로 음란함이 되었다. 홀로 된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발설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한 가장 큰 폭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성은 이와는 반대로 

아내가 죽으면 속현(續絃)이란 그럴 듯한 말로 재혼을 할 수 있었고, 기생제도와 축첩제도 등을 통해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실 개가를 금지하는 것은, 한 남성이 자신이 죽은 뒤에까지 여성의 성을 독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곧 조선의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남성의 성적 욕망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욕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변형될 뿐

가부장제가 아무리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담론을 유포해도 여성의 성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성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변형될 뿐이다.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의 서문은 한평생 밤이면 동전을 굴리면서 지새운 과부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과부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근본을 두고 있고, 정욕은 혈기에 모이며, 생각은 고독한 가운데서 생겨나고, 

아프고 슬픈 감정은 생각하는 데서 우러나겠지. 혈기가 때로 왕성하면 어찌 가부라고 정욕이 없겠느냐?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 그림자를 조문(弔問)하며 외로운 밤 지새기가 괴롭고, 

게다가 처마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든지 창에 달빛이 환히 들어올 때, 오동잎 하나 뜰에 날리고, 

외기러기는 하늘에서 울고 가고, 멀리 닭의 울음소리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쿨쿨 코를 고는데 혼자 잠 못 이루는 이 고충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느냐?” 

어떤가. 과부의 성욕을 억압하는 것이 어떤 형벌인지 짐작이 가는가.

양반가의 이 여인은 자신의 성욕을 억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고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다. 

조선후기의 문헌인 ‘기문’이란 책에는 과부의 이야기가 둘 실려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한 과부가 계집종을 데리고 수절하며 사는데, 계집종 역시 남편을 잃고 수절하였다. 

어느 날 동네에 송이버섯 장수가 왔다. 

과부는 송이버섯이 남성의 성기와 같이 생긴 것을 보고는 계집종을 시켜 값을 따지지 않고 모두 사오게 하였다. 

용도야 뻔하다. 두 여자는 송이를 ‘덕거동’이라 부르고 욕망이 솟을 때마다 덕거동으로 욕망을 달랬다. 

이야기는 이어지지만 여기서 멈추자.

또 다른 이야기 역시 과부의 것이다. 

어느 날 과부가 이웃에 사는 기생이 잘 생긴 사내와 온갖 성희(性戱)를 즐기는 것을 보고 치솟아 오르는 욕망을 누를 길이 없어 집으로 돌아와 자위 행위에 빠진다. 이게 너무 심하여 마침내 말을 못하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할미가 무슨 일로 찾아왔다가 

여자가 벙어리가 된 것을 보고는 한글로 필담을 한 끝에 자초지종을 알아내고는 동네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내를 불러와 짝을 

맺어준다. 사내와 한바탕 거창한 방사를 치른 후 과부는 다시 말을 하게 되었다.

적지 않게 전하는 이런 이야기의 존재는 과부의 성적 욕망이 은폐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데 성공했을 뿐, 그 내면의 욕망을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신윤복의 그림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복을 입은 과부가 개의 짝짓기를 보고 배시시 웃는 그 장면은 그 젊은 과부의 내부에도 성적 욕망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이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그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 같은 신윤복의 그림을 베낀 모방작도 더러 남아 있다. 

신윤복의 그림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물론 수준은 원작에 한참 못 미친다. 

작자 미상의 ‘봄날의 과부 모방작’만 해도 전반적으로 필치가 원작에 

비해 자연스럽지 못하고, 

개의 짝짓기 장면이 아주 천박하게 느껴지는 등 전반적인 수준이 

확연히 떨어짐을 알 수 있다.




    ▲ 작자 미상의 ‘봄날의 과부 모방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