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4.14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敵 만들라'는 움베르토 에코 말, 차이(差異) 무시한 것에 수치 느끼란 뜻
'일본인=가해자=惡'이란 인식은 自意識 작동 멈춘 나쁜 민족주의
내 안의 괴물 극복해야 自我 성숙… 문학은 그 과정과 아픔 상기시켜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에세이가 최근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도발적인 듯하다.
개인이나 국가란 적(敵) 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평화 상태는 기만이나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없을 때에도 내부에서는 수많은 적이 존재한다.
특이한 점은 제목 '적을 만들어라'에서 드러나듯이 적이 없다면 일부러라도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타자'를 의미하기에 자아의 성숙을 위해 '내 안의 괴물'을 극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아무리 '다름'이 '틀림'은 아니며 '차이'와 '차별' 또한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인정한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유발시켰던 것들이 '내부의 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불편한 관계인 이웃 일본과 관련된 사건을 통해 이런 '내부의 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된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불편한 관계인 이웃 일본과 관련된 사건을 통해 이런 '내부의 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된다.
2012년 미스 인터내셔널 1위였던 요시마쓰 이쿠미라는 일본 여성이 지난달 29일 미국 CBS 라디오방송을 통해 위안부가 매춘부이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대해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당연히(?) 일본 네티즌은 "한국인 편에서 말하는 반일(反日) 일본인"이라며 그녀를 비난했다.
그 후에도 위안부들과 같은 여성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이 일본 여성이 일본인들에게는
내부 고발자처럼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국가나 개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의 지난함에 대해 천착해온 작가 전성태의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2005)는 '조센진'이라고
불렸던 한국인의 상처가 '쪽발이'로 불렸던 일본인을 통해 마치 거울처럼 되비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일본으로 징용 나갔던 조선인 남자를 사랑해서 광복 후에 함께 한국으로 오지만 이내 버림받고 멸시받으며 평생 신산한 삶을
살았던 '재한(在韓) 일본인'이자 '가해국 출신의 피해자'인 여주인공 에이코의 존재는 작가의 말처럼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괴물'임을 불편하게 상기시킨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두 경우를 통해 일본인은 가해자인 반면 한국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적 이분법은 사실상 해체된다.
두 경우를 통해 일본인은 가해자인 반면 한국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적 이분법은 사실상 해체된다.
반성하는 일본인이 있을 수 있고, 반성해야 할 한국인이 있을 수 있다.
가해자가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모두 선한 것도 아니다.
각각의 내부의 적들을 통해 과연 누가 그리고 무엇이 적인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물론 이 글처럼 이런 고민을 드러내는 것 자체도 오해받을까 봐 노심초사해야 할 정도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에 있고,
이런 내부적 반성을 반민족적인 자학 행위로 치부해야 편할 정도로 양국은 서로 불편하다.
현재 한국의 정치권에서도 '내부의 적'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우경화가 또 다른 '손톱 밑 가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적보다 무서운 것이 가짜 친구이다. 적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보다 무서운 것이 가짜 친구이다. 적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싸움을 위해서는 이런 가짜 친구와도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은 무해한 웰빙형 음식을 섭취한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가짜 친구들이다.
오히려 카페인과 알코올, 지방과 같은 유해한 물질들과 함께 커피와 맥주, 아이스크림은 그 자체로 제공될 필요가 있다.
뇌관이 완전히 제거되면 폭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학은 아픔을 유발하는 이런 유해물질들이 '내부의 적'으로서 얼마나 필요한지 가늠해준다.
문학은 의학이 아니다. 그래서 문학은 참 불편하고도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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