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2.10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감정, 사회의 최후방으로 중시… '脫감정'은 위기에 무반응한 것
분노 안 해 빼앗긴 존엄성 찾는데 사적인 짜증과 公憤은 구별해야
분노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면 지속적인 단련과 책임이 필요
돌아온 탕아(蕩兒)가 효자 노릇을 할 때가 있다. 최근 인문학 관련 출판계에서 '감정'이 그렇다.
합리적 이성이 적자(嫡子) 취급을 받았던 근대문화에서 충동적 감정은 미숙함이나 위험함의 대상으로
폄훼되었다. 하지만 저임금 노동만큼 감정노동에 관심이 쏠리고, 전자 민주주의에서 감정 민주주의로
초점이 이동해가는 현실을 반영하듯 더 이상 감정이 서자(庶子)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듯하다.
'감정 수업' '감정 독재' '감정의 인문학' 등의 책들에서 감정은 내면의 최전선이자 사회의 최후방으로서
중시된다.
얼마 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화두가 촉발시켰던 반향 또한 감정의 귀환을 방증한다.
얼마 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화두가 촉발시켰던 반향 또한 감정의 귀환을 방증한다.
그동안 얼마나 안녕하지 못했는지, 그런데도 얼마나 안녕한 척하며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최근 번역된 '탈감정사회(Postemotional Society)'에서 문제 삼는 '탈(脫)감정'도 이전 시대라면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였을 사건과 위기에 지금은 반응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다.
감정을 아예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대량생산한 감정을 그대로 소비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맥도널드화' 속에서 감정의 반대말은 '이성'이 아니라 '무관심'이 된다.
더욱 호기롭게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외치는 레지스탕스 출신의 저자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는
더욱 호기롭게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외치는 레지스탕스 출신의 저자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는
전 세계를 감전시켰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지 않았기에 빼앗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자는 권리장전으로 작용했다.
'상실의 시대'에는 '힐링'이 중요하다. 잃어버린 것은 되찾기 힘들기에 감정을 다독이는 것이 최선책이다.
하지만 '분노의 시대'에는 '저항'이 중요하다. 빼앗긴 것은 되찾아야 하기에 행동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물론 모든 분노가 정당할 수는 없기에 사적인 짜증과 공분(公憤)을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
물론 모든 분노가 정당할 수는 없기에 사적인 짜증과 공분(公憤)을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가 '탈감정'에 빠져 있는 '피로 사회'라면 분노의 과잉보다 거세가 더 위험하므로
도덕적 공분을 이기적 욕망으로 사사화(私事化)하려는 음모를 거부해야 한다.
지금의 분노는 10여 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틱낫한의 '화(Anger)'처럼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며 개인의
의지나 심리적 수행을 강조함으로써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고 할지라도 사랑의 감정처럼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분노 자체가 아니라 분노 '이후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고 할지라도 사랑의 감정처럼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분노 자체가 아니라 분노 '이후
(post)'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래에 동일한 분노를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현재의 분노를 기억해야 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국민 영화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그래서 흥미롭다.
영화를 1981년 부림 사건에서 끝내지 않고 말미에 1987년의 상황을 덧붙인 이유가 바로 주인공 송유석이 7년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분노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
우리가 제대로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 많이 분노하면 '동물'에 가까워지고 너무 적게 분노하면 '속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대로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 많이 분노하면 '동물'에 가까워지고 너무 적게 분노하면 '속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분노하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책임하게 보이는 '일시적인 분노'가 아니라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지속적인
분노'이다. 비상식적인 우경화에 빠진 일본이나 비일관적인 북한, 39.7%라는 사상 최악의 청년고용률 등 당면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분노하라.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 분노하라.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분노하라.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 분노하라.
그래야 '분노의 포도'라는 열매를 딸 수 있다. 그 열매를 포도주로 숙성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분노도 단련될 필요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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