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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210] '존엄자' 아우구스투스

바람아님 2014. 7. 1. 11:42

(출처-조선일보 2013.04.10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카이사르가 공화정 수호자들에게 암살당한 후 로마는 내란 상태에 빠졌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3인이 지휘하는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 중 먼저 레피두스가 탈락하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한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여 대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갔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전시에 지녔던 모든 권한을 원로원에 반납하는 모양새를 갖추었고, 원로원은 그것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자)라는 칭호까지 얹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단지 로마의 제1 시민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프린켑스(princeps)라고 자처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 단어를 관례적으로 원수(元首)로 번역한다. 
그리하여 그의 지배 체제를 원수정(프린키파투수·pricipa tus)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당시 체제가 원수와 원로원이 공존하는 방식이며 후대의 완전한 황제 지배 체제와는 다르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것은 모두 정치적 쇼에 불과했다. 원로원은 황제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그의 의지를 충실히 수행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그의 전제 권력의 본질은 무력이었다. 
그가 누리는 또 다른 칭호 임페라토르(imperator·황제를 뜻하는 emperor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원래 군대의 명령권을 가진 
정무관에 대해 승리를 거둔 군인들이 환호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개선식이 끝나면 군사 명령권을 잃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일시적 칭호를 그는 개인 이름으로 영구적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통치한 40여년간은 이른바 아우구스투스 시대로서 로마가 오랜만에 전란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 문화가 융성한 시대였다. 
이제 전쟁보다는 내치에 힘써 체제를 정비하고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그 자신이 자부하듯 "벽돌 도시 로마를 대리석 도시로 바꾸었다.
" 200년에 이르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독재자도 이런 정도는 해야 '존엄'을 운위할 수 있다. 
어이없는 불장난과 상스러운 말로 남들에게 '최고 존엄'을 강요하면 조롱거리밖에 안 된다. 
존엄한 원수가 아니라 민족의 '웬수'가 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