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模倣할 수 있어 창조·소통·기쁨 가능
지위 높을수록 베낄 사람 없어 삶이 지루해…
남 존중하며 겸손하게 흉내 내야 소외감 떨쳐
내가 나이 쉰 살이 넘어 교수를 '때려치우고' 일본에서 그림 공부 한다고 하니, 다들 '조영남 흉내' 내는
늙어갈수록 뒷모습이 폼 나야 한다. 뒷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는 '은퇴 교수'보다는 쭈그리고 앉아 그림 그리며 늙어가는
일단, 남 흉내 내는 것을 그렇게 폄하하면 안 된다.
고흐풍의 의자. /김정운 그림
오늘날 우리가 남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초로 여기는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에서
유래한다. 1873년 독일의 심리학자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미학적 체험을 '감정이입(Einf�hlung)'이란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감정이입'이란 그 전에는 없었던 개념이다.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in-feeling, 또는 feeling-into)'는 뜻의 이 독일어는 영어권에서는 '공감(Empathy)'으로
번역되었고, 오늘날에는 일상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니까 인류가 타인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심리적 과정을 학문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불과 150년 전이라는 이야기다.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에 인류가 관심을 가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미개했다.
아무튼, 미메시스로부터 공감에 이르기까지의 개념적 진화를 통해 인간은 서로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그렇다.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의 정서 표현을 그대로 흉내 낼 때 제대로 이해된다.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 정서의 모방 능력을 뜻한다.
오래 함께 산 부부의 모습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생긴 것이 닮아서가 아니다. 서로의 정서 표현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흉내 내는 사람이 사랑받는다.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흉내 내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
그뿐만 아니다. 흉내 낼 수 있어야 창조적이 된다.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에 따르면 모방이 창조적 능력으로 진화하는 것은 '지연모방(遲延模倣·Aufgeschobene
Nachahmung)'이 가능하면서부터다.
두 살 무렵이 되면 아동은 며칠 전 본 것을 기억해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행위를 머릿속에 상징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연모방과 같은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이다. 빗자루가 비행기가 되기도 하고, 베개가 달리는 말이 되는
것과 같은 창조적 '상징놀이'는 바로 이 지연모방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지연모방'은 피아제의 개념 중 가장 기막힌 통찰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이 흉내 내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왜 어린아이가 인형이나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하는 것일까? 장난감이 대상 세계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스포츠와 같은 어른들의 놀이도 내용이나 규칙이 더 복잡해졌을 뿐, 그 본질은 모방에 있다.
흉내 내면 즐거워진다. 나이 들면서 삶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도무지 흉내 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삶이 지루해지는 이유도 도대체 더는 모방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일수록 고독한 거다.
그러나 가장 처절한 상황은 누굴 흉내 낼 생각도 없고, 그 누구도 나를 흉내 내주지 않을 때다.
아, 세상이 이보다 더 쓸쓸할 수는 없는 거다.
젊은 날의 성공이 자랑스러울수록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남 흉내를 열심히 내야 한다. 그래야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삶이 지속적으로 창조적이 된다. 삶은 나이 들수록
재미있어야 한다. 그렇게 쓸쓸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늙어갈 거면 오래 살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