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9.15 서울대 교수·서양미술사)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는 늘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다.
4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위인(偉人)의 예로 밀레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화가 밀레가 진실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를 떠나 농촌(바르비종)에 가 어렵게 생활하면서 참된 농민의 모습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농민 화가 밀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된 위인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밀레는 교육을 잘 받은 부농의 아들이었고 바르비종에서도 하녀를 둘 정도였으며, 파리를 떠난 이유도 단순히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잘못된 밀레의 신화는 그의 친구이자 화상이었던 상시에가 밀레의
전기(傳記)를 미화시켜 펴냈기 때문이다.
우람하고 거친 농민의 이미지인 '씨 뿌리는 사람'은 농민의 사회적 힘을 강조하고 억압된 농민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삭줍기'도 배경에 추수 낟가리를 쌓아두고 있는 부농과 혹시 남은 이삭이라도 주워가려고 허리를 굽힌 빈농의 세 여인은
사회 계급의 대비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 그림은 단지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자연에서 일하는 인간의 고귀한 노동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밀레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에서 밀레의 그림을 보았던 방식이다.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걸릴 정도로 대중적 우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밀레가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미술은 사회비판적 미술이 아니라 근대화되어 가던 우리 사회에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 전원미술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게시자 추가 이미지)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06.6×82.5cm, 1850, 보스턴 미술관 | |
장 프랑수아 밀레, < 이삭 줍기> | |
'빈센트 반 고흐'의 모작, 씨뿌리는사람 이외에도 밀레의 작품을 모작한 고흐의 여러 작품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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