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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콘서트] 나를 비우고 경청하라… 論爭 대신 對話를 하면 갈등이 풀린다

바람아님 2014. 11. 3. 21:00

(출처-조선일보 2014.11.01 정리=이위재 기자)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下)
경청은 곧 공감 -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 대화가 가능하다면 갈등은 문제가 아닌 기회
인문학의 역할 -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이 인문학이 있을 자리… 지역·계층·좌우… 서로 다른 것을 이어줘야

조성택 고려대 교수조성택<사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을 지난주에 이어 소개한다.

대화란 얼마나 중요한가.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휴가 나온 군인을 살해한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 자수를 설득한 주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주부는 "무섭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범인이 흥분했지만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아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고 답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무서울 게 없다. 
길에서 개나 호랑이를 만나면 무서울 수 있다. 
술 취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무섭지 않다. 
원효의 화쟁(和諍)은 바로 대화의 철학이다.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휴가 나온 군인을 살해한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 자수를 설득한 주부 사진
▲ 조선일보 DB
논쟁과 대화는 다르다

논쟁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반면 대화는 저 사람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저 사람 얘기에 공감하면서 저 사람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논쟁은 반드시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주장만 하지 말고 대화하면서 상대 관점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환경이냐 안보냐 티격태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보와 환경, 둘 다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왜 양극단에서 양자택일 논쟁만 할까. 
이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다. 
그런데 정의란 정의 그 자체뿐 아니라 해결과 화해의 과정에서 의미가 커진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콘퍼런스에 갔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한 발표 부분에서 보수 단체 인사들이 진행을 제지했다. 
처음엔 언짢았는데 30분 정도 얘길 들었더니 경청할 내용이 있더라. 
4·3사건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델라가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다. 
화해하기 전 진실 규명이 먼저라고 얘기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진실 규명이 아니라 화해가 전제된 진실이라면 
좀 더 승화된 화해·진실이 가능하지 않을까.

경청은 화쟁적(和諍) 대화의 과정

일러스트▲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앞서 얘기한 원효의 화쟁(和諍), 개시개비(皆是皆非)는 
양비론이 아니다. 
의견이 다르고 논쟁하더라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말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다고 인정하면 
내가 틀린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각자 주장은 나름대로 옳음이 있다.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和諍)이고, 민주 시민의 지혜다.
경청은 화쟁적 대화의 과정이다. 
경청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냥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을 비우고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경청도 그렇다. 
상대방 얘기의 약점을 찾기 위해 경청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경청은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즉 공감하는 것이다.

요즘은 공감을 심리학에서 많이 쓰지만 원래는 시 창작 이론에서 나왔다. 
꽃에 대한 시를 쓸 때 꽃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꽃이 되어볼 때 시가 나온다. 
공감이란 '바라보기'에서 '되어보기'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것만으로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여기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거나 해결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한결같이 경청하는 데서 
합의의 실마리가 잡힌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낙태 문제를 놓고 대립이 벌어졌다. 
낙태 시술 병원에 방화가 발생하는 등 격렬한 논란 끝에 낙태를 불법화했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을 이끌었던 주민이 지역 신문에 기고해 "낙태를 하지 못해 태어난 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다음엔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찾자고 요청했다. 
낙태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둘 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은 비슷하다.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경청과 공감이 사랑의 에너지

대화가 가능할 때 갈등과 분쟁은 문제 상황이 아니다. 
사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단일 의견만 존재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간디는 "갈등과 분쟁은 진리를 드러내는 에너지이고 기회"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발전의 기회와 에너지로 만들지 못하는 행태가 문제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다. 둘 간(dia)의 논리(logue)라는 말이다. 둘 다 말이 되는 논리라는 의미다. 
그리스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국왕인 삼촌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을 저지른 오빠 장례를 강행한다. 
왕은 국법을 어긴 반역자는 적절한 장례를 허용할 수 없다는 통치 논리를, 안티고네는 가족의 윤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화해할 수 없는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남긴다.
성경도, 불경도 결국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게 인문 정신의 본질이다. 
오규원 시인의 '무법'이란 시에는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데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사랑하는 길만 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결국 사랑의 에너지다. 

예컨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법률적 완결성과 합법성이 쟁점이 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결여된 건 '사랑'이었다.

법 논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틀린 게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 심정을 그 논리와 법이 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

체념(諦念)도 중요하다. 체념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체(諦)는 사실 진리 '체'자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 할 때 그 글자다. 

국어사전에도 희망을 버리고 단념함과 더불어, 두 번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 나와 있다.

대화에 있어서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입장에서 체념은 중요한 덕목이다. 

주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체념이다.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희망'이 아니라 미련일 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 교수는 "글이란 글 밖에 있는 걸 글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사물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저기 있는 나무는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고, 나는 내 공간이 있다. 내 인식의 공간을 뜻한다. 

내 의식이란 캔버스는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저기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글쓰기라고 하는 건 주관의 체념이다.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완성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위한 작은 합의, 공통의 분모가 만들어지려면 자기주장을 체념하는 게 중요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다. 합의의 결과가 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교시를 남겼다.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기 종교는 사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인문학에서 세계의 중심은 아픔이 있는 곳

인문학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어딜까.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딘가. 가슴? 마음? 

아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된다.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다.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이 세상의 아픈 곳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또 지금 우리 사회가 앓는 분쟁과 갈등의 현장이다. 

인문학은 사회 가장 아픈 곳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준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게 인문학이다. 

흔히 좌우, 진보 보수, 왼쪽 오른쪽을 다르다고 한다. 다르기도 하고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쟁과 갈등을 문제 상황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게 진리를 드러내는 더 큰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