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11.01 정리=이위재 기자)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下)
경청은 곧 공감 -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 대화가 가능하다면 갈등은 문제가 아닌 기회
인문학의 역할 -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이 인문학이 있을 자리… 지역·계층·좌우… 서로 다른 것을 이어줘야
조성택<사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 ▲ 조선일보 DB
논쟁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환경이냐 안보냐 티격태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콘퍼런스에 갔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한 발표 부분에서 보수 단체 인사들이 진행을 제지했다.
경청은 화쟁적(和諍) 대화의 과정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요즘은 공감을 심리학에서 많이 쓰지만 원래는 시 창작 이론에서 나왔다.
이것만으로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여기가 되어야 한다.
경청과 공감이 사랑의 에너지
대화가 가능할 때 갈등과 분쟁은 문제 상황이 아니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다. 둘 간(dia)의 논리(logue)라는 말이다. 둘 다 말이 되는 논리라는 의미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결국 사랑의 에너지다.
예컨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법률적 완결성과 합법성이 쟁점이 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결여된 건 '사랑'이었다.
법 논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틀린 게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 심정을 그 논리와 법이 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
체념(諦念)도 중요하다. 체념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체(諦)는 사실 진리 '체'자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 할 때 그 글자다.
국어사전에도 희망을 버리고 단념함과 더불어, 두 번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 나와 있다.
대화에 있어서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입장에서 체념은 중요한 덕목이다.
주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체념이다.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희망'이 아니라 미련일 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 교수는 "글이란 글 밖에 있는 걸 글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사물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저기 있는 나무는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고, 나는 내 공간이 있다. 내 인식의 공간을 뜻한다.
내 의식이란 캔버스는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저기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글쓰기라고 하는 건 주관의 체념이다.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완성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위한 작은 합의, 공통의 분모가 만들어지려면 자기주장을 체념하는 게 중요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다. 합의의 결과가 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교시를 남겼다.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기 종교는 사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인문학에서 세계의 중심은 아픔이 있는 곳
인문학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어딜까.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딘가. 가슴? 마음?
아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된다.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다.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이 세상의 아픈 곳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또 지금 우리 사회가 앓는 분쟁과 갈등의 현장이다.
인문학은 사회 가장 아픈 곳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준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게 인문학이다.
흔히 좌우, 진보 보수, 왼쪽 오른쪽을 다르다고 한다. 다르기도 하고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쟁과 갈등을 문제 상황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게 진리를 드러내는 더 큰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되게 하자.
'人文,社會科學 > 人文,社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의 향연] 할리우드 영화가 時間을 다루는 방식 (0) | 2014.11.17 |
---|---|
[지식 콘서트] 행복은 生存위한 수단… 사람·음식을 찾도록 하는 생물학적 신호 (0) | 2014.11.09 |
[지식 콘서트]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0) | 2014.11.02 |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幸福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0) | 2014.10.31 |
[인문의 향연] 言語마저 고도비만증을 앓는 시대 (0) | 201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