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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言語마저 고도비만증을 앓는 시대

바람아님 2014. 10. 27. 10:14

(출처-조선일보 2014.10.27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해야 할 말 못한 이는 침묵하고

진실 호도하는 소음의 언어는 인터넷과 SNS로 확대·재생산… 

사람은 말한 걸 생각하는 존재

말을 함부로 하는 게 문제라면 언어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사진올해의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구효서는 수상 인터뷰에서 
"작가는 세련되고 능숙한 말솜씨에 회의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인들은 확신에 차서 유창하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번지르르한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라고 밝혔다. 
흔히 '존재의 집'에 비유되는 숭고한 언어마저 편향성과 공격성을 지닐 수 있기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상 작품집인 '별명의 달인'의 표제작에서 정확하고 날카로운 별명을 지어주기로 유명했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몰라"  "없어"라는 최소한의 언어만 발화(發話)하며 묵언수행을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문체주의자'로 평가받는 김훈 또한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는 방편으로 수식어를 자제하고 
접속사를 거부한다. 언어의 낭비를 혐오하기에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문장을 꿈꾼다. 
그래서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 사이에서 오가는 
'그 뒤집히고 자빠지는 말들의 아수라'를 비판적으로 중계한다. 
헛되이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작가가 간신히 건져낸 언어는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라는 
치욕 그 자체와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라는 사실 그 자체이다.

말을 쓸데없이 많이 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무엇을 말할지 몰라서 더 많은 말을 하는 경우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듯이, 이때의 말은 풍요 속의 빈곤에 가까워 헛헛하다. 
또 하나는 무엇을 말하지 않기 위해 다른 말들로 숨기는 경우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들통날까 봐 애꿎은 사람과 친한 척한다면 이때의 말은 빛 좋은 개살구여서 실속이 없다. 
이처럼 '몰라서' 혹은 '숨기려고' 오고 간 많은 말들은 실상 아무 말도 아니다.

좀 더 사회적 차원에서 살펴볼 때 최근 출간된 '적을 만들다'에 실린 강연글 '검열과 침묵'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침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말하게 하는 '소음'을 통한 검열이 더 위험하다고 비판한다
침묵은 분명하게 검열을 '노출'한다. 하지만 소음은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면서도 그런 검열을 '은폐'한다. 
이 때문에 왜 우리가 현대로 올수록 수많은 말에 둘러싸여 고독이나 고요함을 잃어버리는지, 
어떻게 진정한 대화나 이성적 판단으로부터 멀어지는지 알려준다. 
소음의 언어가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를 통한 소통과 공유가 원활한 시대에는 하지 못하는 말보다 하지 않아도 좋은 말이 난무한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침묵은 계속 침묵인 채로 남아 있는데, 
진실을 호도하는 소음의 언어는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떠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억눌렸던 침묵의 언어에 물꼬를 터주는 순기능보다 불필요한 소음의 언어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기능에 더 경도되는 경우다. 
요즘에는 시쳇말로 남녀는 '썸'을 타기 위해, 정치인은 '간'을 보기 위해, 누리꾼은 '썰'로 이기기 위해 
필요 이상의 말을 남용한다.

이처럼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면 언어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구효서의 "생각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한 것을 생각하는 거야, 사람은."이라는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라면 필요한 말을 하는 것만큼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소중하다. 
의무가 아닌 권리만 주장될 때는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권리도 소중하듯이 언어마저 고도비만증을 앓는 시대에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언어의 궁핍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문학의 언어는 점점 더 홀쭉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