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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부정적인 한국어'

바람아님 2015. 2. 12. 10:41

(출처-조선일보 2015.02.12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스페인어 'Que será será(케 세라 세라)'를 직역하면 '될 것은 된다'쯤이다. 

흔히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하는 말로 알지만 조금 다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 너무 걱정 말고 운명에 맡겨라' 하는 낙천적 얘기다. 

도리스 데이의 1956년 팝송으로 널리 알려져 그해 첫 남극 착륙에 나선 미군기 이름이 됐다. 

영어로도 'Que sera sera'가 관용(慣用) 표현으로 굳어 옥스퍼드 사전에 올랐다. 

이탈리아어로는 'Che sarà sarà(케 사라 사라)'다.


▶굳이 스페인어로 '안달 말고 느긋하게 살아라'고 하는 연유는 분명치 않다. 

스페인어권 사람이 유난히 낙천적이어서 그러지 않나 싶다. 스페인어는 중남미까지 열아홉 나라 4억명이 쓴다. 

스페인은 늘 따뜻하고 햇빛 풍성하다. 사람들이 낙관적·감성적·예술적이다. 

도둑에게도 '올라(Hola)!'라고 인사한다는 나라다. 

스페인에 몇 백 년 식민 지배를 받은 중남미는 더하다. 못 먹고 못 입어도 늘 웃는다. 내일보다 오늘을 즐기며 산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미국 버몬트대가 신문기사·영화·검색·SNS에 쓰인 열 개 언어의 스물네 사례를 분석했다. 

그랬더니 긍정적 단어가 단연 많은 것이 스페인어였다. 

구글 검색, 구글 북스, 트위터에 쓴 스페인어가 1~3위를 차지했다. 2년 전 미국 갤럽의 긍정도(度) 조사도 그랬다. 

148개국 사람에게 "어제 많이 웃었는가" 비롯해 다섯 가지를 물었다. 

"그렇다"는 비율이 파나마·파라과이가 85%로 공동 1위였다. 

10위 안에서 태국·필리핀 빼고 여덟 나라가 중남미였다.


▶버몬트대 조사에서 꼴찌는 구글 검색에 쓴 중국어다. 

한국어는 영화 자막이 꼴찌에서 둘째 23위, 트위터가 20위다. 

우리 영화 자막이 얼마나 속되고 거친지는 극장 몇 번 가면 금세 안다. 

SNS와 인터넷은 쓰레기 더미라 해도 싸다.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란이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김광림 '쥐')


▶영어권에선 "행복하냐" "행복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다. 우리 일상에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이다. 

언어는 심성(心性)이 내는 소리다.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우리는 먹고사느라 바쁘고 각박하게 살아 왔다. 

이젠 한숨 돌리고 황인숙의 시처럼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말이 고우면 마음도 고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