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아내의 심장 받은 女배우와 사랑에 빠진 男 -자전적 에세이

바람아님 2013. 3. 26. 22:05
      타인의 심장

때론 실화가 더 영화적인 법. 자전적 에세이로 풀어내는 저자의 놀랄 만한 삶과 사건이 딱 그렇다. 책의 저자는 미모의 프랑스 영화배우. 국내 영화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화 ‘올란도’(1992년)에서 신비롭고 청순한 샤샤를 연기했던 여배우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그녀는 1986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영화 ‘붉은 키스’로 은곰상을 수상한 배우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영화적이다. 세밀한 묘사와 복선을 암시하는 사건들, 필름을 편집하듯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다. 현실의 이야기지만 그의 삶의 이야기가 어찌나 극적이던지 마치 잘 짜여진 영화의 플롯처럼 느껴질 정도다. 복합적 상징과 모호한 복선으로 가득한 한 편의 예술영화를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제라드 헬프트 파리병원 심장병학과 교수는 서문에서 “샤를로트 발랑드레(사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장기를 주는 사람과 그 장기를 받는 사람 사이의 연결성을 생각해보게 된다”며 “나의 심장이 그 사람의 심장이 돼 새로운 희망과 새 삶을 준다는 것은 분명 인류애의 한 가지 실천 방법으로 기록될 일이다. 발랑드레의 증언은 바로 그 희망에 대한 메시지인 동시에 여전히 풀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기억의 전달에 대한 이야기”라고 썼다. 그의 스토리는 ‘피 속의 사랑’이라는 TV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작가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자신을 연기하기도 했다. 작가는 현재 ‘생명의 이식’ 재단의 대모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세자르영화제 신인연기자상 후보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며 동화적인 삶을 꿈꾸던 열일곱 나이의 신인 여배우. 그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난관은 무책임한 첫사랑이 가져다준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이었다. 에이즈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항바이러스제의 지속적 복용의 후유증으로 심장이 기능을 잃자 죽음의 위기에서 심장이식수술을 받는다. 그의 심장은 적출되고 기증자의 심장을 이식받은 것이다.

수술 이후 건강을 추스른 그는 이유없이 반복되는 교통사고의 악몽에 시달린다. 낯선 거리에서 낯선 차량 안에서 사고를 당하는 꿈이다. 그러다 어느날 저자는 익명의 남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샤를로트, 당신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심장을 사랑했었죠. 당신에게 연락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략) 그 심장을 이식받는 분을 알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그러다 당신을 찾았습니다. 묘한 감정이 느껴졌지요. 아름다운 느낌이기도 했고요.’(샤를로트에게 보낸 얀의 편지)

그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기 전날, 파리의 시내에서 한 건의 교통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로 사망한 아내의 심장이 그에게 이식됐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남자의 편지는 아내의 심장을 받은 저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익명의 남자는 편지 말미에 추신을 달아 자신의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글을 보태놓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혹시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다면, 매 순간 고통스럽게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당신을 따라가고 싶지만 망설이고 있어.’ 아내로부터 장기를 받아 생명을 건진 저자에게 사랑의 편지를 띄우면서도 저자의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뛰고 있는 아내의 심장에게도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식이다.

한 번도 자신에게 심장을 준 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저자는 편지를 받고 충격에 휩싸인다. 몸 안의 심장이 누군가의 몸 속에서 뛰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저자는 반복되는 꿈이 단순한 악몽일 뿐 장기공여자의 사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심리치료사의 위로와 점쟁이들의 신비로운 예언, 그리고 이식된 장기의 세포가 이전 주인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가설인 ‘세포기억’의 이론을 오가며 혼돈스러워한다.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오른 저자는 관객석의 한 남자와 만남을 갖게 되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교통사고로 자신에게 심장을 주고 사망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저자에게 편지를 보낸 익명의 남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과연 저자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저자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임자인 죽은 아내를 사랑한 것일까. 이런 상황 앞에서 저자는 과연 남자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가 더없이 극적이지만,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 긴 투병의 고통, 장기이식에 따른 정체성 혼돈 등의 고통스러운 삶의 기록이니만큼 ‘흥미진진’이라는 수사는 왠지 불경스러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