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우리'가 사라진다

바람아님 2015. 9. 3. 09:48

(출처-조선일보 2015.09.03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내 집에 빨리 가고 싶어." 막 말문이 트여 수다쟁이가 된 어린 딸이 집에 가고 싶다 보채며 
'우리 집'을 '내 집'이라고 표현할 때 기분이 묘해진다. 
평생 '내 집 마련'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내 집이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었기에, 
도대체 어디서 저 단어를 배웠을까 싶다. 
분명히 '나의'를 써야 맞는데 '우리'라는 확장된 관계의 모호한 개념으로 사적인 소유를 표현하는 
독특한 우리식 어법 탓이다.

물론 내 집이나 우리 집이나 같은 집이니 듣기 어색할 뿐 오해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남북한을 포함하는 우리나라가 그렇다. 
어려서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을 묻는다면 단연코 한라산이 아니고 백두산을 꼽았으며, 지도를 그리라면 그 모양이 
호랑이냐 토끼냐로 다투었다. 그런 상식에 근거하여 우리는 설악산 개발보다도 중국의 백두산 난개발에 합심하여 발끈한다. 
헌법에 규정된 우리나라가 무궁화 삼천리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서적으로도 북한은 여전히 
우리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헤어진 이혼 상대의 재산을 과연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상대도 내 것을 당연히 우리 것으로 부를까. 
거슬러 올라가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를 다 포함해 우리나라라고 칭했을까. 원래 우리 것은 무엇일까. 
확실한 건 북한은 내 나라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을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건 이별의 아픔을 넘어서는 연민의 언어로 포용되지만, 내 나라라고 부르면 범죄자로 전락한다. 
어째서 북한은 우리나라이면서 동시에 내 나라가 되지 못할까. 혹시 딸이 묻는다면 짧게 대답해주진 못할 것 같다. 
혹시 모를 그 두려움 때문에 딸에게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고 해야지, 라며 문법 교정을 해주려다가 참았다.
[일사일언] '우리'가 사라진다
길이라는 것이 내딛는 발걸음에 따라 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미 그 또래들이 쓰는 말에 대한 괜한 참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길들이 굳어져 혹여 '우리'가 퇴행하고 '나'만 남는 시절이 올까 봐 초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