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객지의 밤 가을의 상념

바람아님 2015. 9. 13. 00:59


조선일보 : 2015.09.12 

객지의 밤 가을의 상념

책을 덮고 앉았더니 풀벌레 우는 소리
가을밤은 한참 전에 자정을 넘겼다.


이 고장 풍경은 가을빛에 물들었고
나그네 심사는 등불빛에 젖어든다.


멀리 떠나 공부하자니 어머니 불쌍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자니 친구 보기 창피하다.


서글픈 마음 누구에게 말을 걸까?
불평이 솟구치는 노래 길어만 간다.


旅夜秋思

廢卷坐蟲聲(폐권좌충성)
秋宵已數更(추소이수경)
節物侵鄕色(절물침향색)
燈光入客情(등광입객정)
遠學悲慈母(원학비자모)
歸耕愧友生(귀경괴우생)
惻惻無誰語(측측무수어)
長歌激不平(장가격불평)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일러스트

조선 정조·순조 연간의 선비 수산(睡山) 이우신(李友信·1762~1822)이 가을철 여행 중에 썼다. 아마도 집을 떠나 공부하러 멀리 가던 길이었던가 보다. 여관에 앉아 책을 펼쳤더니 마음이 싱숭생숭, 풀벌레 소리 듣다 보니 밤이 벌써 깊다. 창밖 너머는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이 좋은 철에 객지에서 등불을 마주하니 제쳐두고 있던 고민과 갈등이 더 부푼다. 출세하려면 이렇게 멀리 떠나 공부하는 것이 옳은 것 같기는 한데 나이 드신 어머니 고생은 나 몰라라 하는 짓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고 귀향하자니 다른 친구들에게 뒤처질까 걱정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서글픈 생각이 밀려드는데 그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없다. 깊은 밤 장탄식하는 나그네의 한숨만 길어진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