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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 '생전 양위' 메시지 발표..아베 개헌에 제동 걸릴까

바람아님 2016. 8. 9. 00:02
경향신문 2016.08.08. 17:12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살아있는 동안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의향을 8일 오후 3시 영상 연설 형식으로 발표했다. 아사히신문 등 현지 언론은 일왕이 직접적으로 “퇴위”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양위를 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일본 왕실은 근 200년만에 처음으로 국와의 ‘생전 양위’라는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평화헌법 수호자’ 역할을 해온 아키히토 국왕의 양위 문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추진해온 개헌 작업의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디오 연설은 궁내청에서 미리 찍은 11분짜리 영상으로 돼 있었다. 평소 평화를 지지해온 일왕은 “전후 70년이라는 큰 고비를 지나 2년 후에는 헤이세이(아키히토의 연호) 30년을 맞이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왕으로서 국민 통합의 상징적 역할을 하기 위해 국민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성장하려고 노력해 왔다”며 국민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눴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번의 수술과 고령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기존처럼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다”면서 “국가의 일과 활동을 한없이 축소해 나가는 대처법은 무리가 있을 것”이라며 양위의 뜻을 내비쳤다.


궁내청은 영상 연설을 사이트에 게재하고 일본어 전문과 영어 번역문도 함께 실었다. 일왕이 영상연설을 내놓은 것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에 이어 두번째다. 영상 방송을 전후해 도쿄의 왕궁 주변에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일본에서는 왕실 제도를 규정한 ‘황실전범’에 퇴위 규정이 없는 것을 놓고 수차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궁내청과 과거 자민당 정부들은 섭정 제도 등이 있기 때문에 퇴위 규정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이번 연설에서 섭정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아키히토가 살아있는 동안 양위를 하려면 ‘황실전범’을 개정해야 한다. 전범 제4조는 국왕 별세 시 왕세자가 곧바로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전범을 개정하려면 2∼3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아키히토는 1989년 제125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1세에 패전을 눈으로 지켜본 그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잘못을 절감하며 평화를 강조해왔다.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총리의 우경화 행보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제3차 아베 내각이 출범한 지 닷새 만에 ‘양위’ 발표를 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진보매체인 ‘겐다이(現代)비즈니스’는 국왕이 아베 내각의 개헌 추진에 불안을 느끼고 생전 퇴위 입장을 밝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베 내각의 신임 각료들은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2항을 개헌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보여왔다.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올초 BS아사히 방송에서 “헌법 9조2항을 개정하고 자위권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가 이나다 등을 전진배치한 이번 개각을 통해 개헌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분간 일본 국민들의 관심은 논란 많은 개헌문제보다는 양위 문제와 전범 개정에 쏠리게 됐다. 자연히 개헌 논의는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아베가 2018년 9월까지인 임기 동안 개헌을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보수 주간지 주간신조(週刊新潮)는 “전범 개정에 시간이 걸릴 것이고 결과적으로 개헌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봤다. 자민당 내부에서는 “양위 발표로 아베 내각이 허를 찔렸다”는 반응도 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생전 양위에 대해 국민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6~7일 산케이·후지TV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4.7%는 “생전에 퇴위할 수 있게 규정을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국민의 관심이 양위에 쏠린 만큼 정부도 우선 순위를 개헌보다 전범 개정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아키히토의 발표 직후 “국민을 향한 발언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일단 여론을 지켜보면서 퇴위 문제를 다룰 지식인위원회 등을 꾸리고 전범 개정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7일 전범을 개정하는 대신 현 국왕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에 줄곧 친근감을 표시해온 아키히토는 1996년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우리 국가가 한반도에 크나큰 고통을 가져온 기간이 있었다”며 “깊은 슬픔”을 표명했다. 지난해 8월 15일에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에 쐐기를 박듯, 종전 70주년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2차 세계대전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키히토가 양위를 하면 왕위는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56)가 승계하게 된다. 왕세자도 아키히토 못지 않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나루히토는 지난해 2월 “앞선 전쟁으로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고통과 큰 슬픔을 겪은 것을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라며 평화주의를 강조했다.


자민당이 추진하고 있는 개헌 초안에는 일왕을 국가의 ‘원수’로 명문화하고 실질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아키히토 뿐만 아니라 나루히토 왕세자도 ‘상징’적인 의미의 일왕을 넘어서는 역할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나루히토는 2014년 “지금의 일본은 전후 헌법을 기초로 쌓아올려졌고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윤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