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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남정욱의 명랑笑說] 항쟁만 늘어놓은 게 역사라고?

바람아님 2017. 11. 11. 08:05

(조선일보 2017.11.11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남정욱의 명랑笑說] 


비리아투스·부디카… 다들 자기 나라에선 고대 항쟁사 이끈 영웅
하지만 유럽사 뼈대는 문명의 틀 만든 로마, 발전사 없인 '역사' 안 돼


항쟁만 늘어놓은 게 역사라고?
로마 제국 팽창사는 한편으로 이민족 수난사이자 그들의 반(反)로마 민족해방 투쟁사다.

로마가 신흥 제국으로 쑥쑥 자라는 동안 주변 이민족들은 골병이 들었다.

혹시 비리아투스, 아르미니우스, 부디카 같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제 나라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 인물들이다.

한니발을 무찌른 후 로마가 제일 먼저 손본 게 루시타니아다.

지금의 포르투갈 자리에 있던 나라인데 알프스를 넘기 전 한니발은 군사를 불리기 위해 루시타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루시타니아냐고 묻는 참모에게 한니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 나라에는 협정이라는 단어가 없다네." 승리 아니면 전사(戰死)지 중간은 없는 나라라는 얘기다.

로마는 절대 잊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는 나라다. 자신들의 제국을 유린했던 루시타니아에 로마는 그 몇 배로 갚아준다.

성깔 있는 민족이니 맞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루시타니아 해방 전선을 이끌었던 인물이 비리아투스다.

로마는 부하들을 매수해 그를 죽였고 루시타니아의 식민 지배는 200년 동안 이어진다.


로마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게 게르마니아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질서정연한 로마군에게 사정없이 박살 나는 털북숭이들이 게르만족인데

중무장한 채 매일 20㎞를 달리고 종일 찌르기 연습을 하는 전쟁 기계 로마군단에 농사나 짓던 이들이 상대가 될 리 없다.

로마는 점령지에서 부족장들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대부분 로마에 동화되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민족 정체성을 안 까먹고 동족에게 돌아온다.

로마군 장교 출신이 저항의 리더가 되자 전투의 양상이 달라진다. 아르미니우스는 연달아 로마군단을 격파했고

결국 로마는 게르마니아를 포기하고 철수한다.

얼마 후 로마가 새로 점찍은 곳이 안개와 이상한 신들의 나라였던 브리타니아다.

이때 브리타니아 저항전선의 주인공이 여왕 부디카인데 그녀는 "적들의 핏속에서 수영하게 하소서" 노래를 부르며

로마인이라면 아이들까지 죽였다. 로마의 대응은 무자비했다.

반란군을 얼마나 죽여서 태웠는지 콜체스터에는 아직도 그때 탄 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정의롭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한다.

그럼 이 이야기들만 이어 붙이면 고대사가 완성될까. 당연히 안 된다.

항쟁사는 그들에게나 의미가 있지 문명 발전사의 측면에서는 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역사책에는 로마 얘기만 지겹도록 나온다. 유럽 문명 최소한의 통일을 이루고 서양식 제국의 기본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사만 그럴까. 한국사도 마찬가지다. 항쟁과 저항만으로 한 나라의 궤적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 오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님은 박물관의 전시 구성을 바꿔 나가겠다며

"제주 4·3처럼 오랫동안 외면받아온 역사가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제주 4·3에까지 이렇게 우호적인 분이라면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이분 역시 항쟁으로만 역사를 편집하고 싶은 거다. 그러나 '4·3+4·19+6·3+5·1


8+6월 항쟁=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공식은 나올 수 없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라면서 박물관이 온통 저항의 흔적뿐이라면, 그건 절대 같은 나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