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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60) 일제시대 청계천 빨래터는 유료였다

바람아님 2013. 10. 24. 11:24
    청계천(淸溪川)은 일제가 붙인 미명(美名)처럼 항시 맑은 물이 흘렀을까? 그렇지 않았다. 태종이 자연하천을 넓혀 판 인공

배수로였기에 '개천(開川)'이라 명명했지만, 만든 직후부터 장마철이면 흙탕물이 집과 사람을 삼키곤 했다. 그럼에도 세종

이후 200년간 준설은 없었다. 광교(廣橋) 아래 모든 물길이 메워져 버린 영조 때에야 천변(川邊)에 석축(石築)을 쌓고 토사를

퍼냈으며, 표석을 세워 준설의 기준점을 세웠다.

"공경대부와 서민을 막론하고 개천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해야 한다"는 영조의 당부는 1908년까지 지켜졌다. 그러나 일제는

1918년까지 2, 3년 주기로 행해진 준천(濬川)을 하지 않았고,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청계천은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떼를 지어 빨래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쾌하다. 걸레를 빨아도 더러운 물에 의복을 빠니 이 얼마나 비위생적이냐"라고 개탄한

1928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보도는 시대를 증언한다.


1930년대 광교 부근 청계천변 유료 빨래터. 빨래하는 아낙 뒤편 석축은 영조(英祖) 때인 1773년에 쌓았다.

 

 

1930년대 청계천 빨래터 모습이 담긴 사진은 역설을 범한다. 물이 깨끗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펴낸 '조광(朝光)'에 1936년 연재된 서울 사투리가 귀에 감기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믄, 둔(돈)을 내요?"

"해마다 경성부청에다 갖다 바치는 세금만 해두 수십환야." "그런 줄 누가 알었나요?" "저런. 시굴서 첨 올라 물르구 그랬군

그래. 그저 이번은 그냥 눌러 봐 주구료." 상경한 지 며칠 안 된 촌 아낙이 '경알이(서울사람)'의 삶에 적응하며 겪은 소극(笑劇)

을 묘사한 소설 속 대화는 그때 거기의 속살을 헤집는다.

석축 바로 옆 빨랫돌 사이 물줄기는 하천수가 아닌 땅에서 솟은 샘물이었고, 이 샘터는 주인이 있는 유료 빨래터였다. "들여다

보구만 있으면 으떡하니? 어서 발 벗구 들어가서 똥물에도 고개 푸욱 파묻고 그저 찾아봐야지."

장난치다 빠뜨린 동전을 찾으라는 어른의 성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경을 치면 쳤지. 누가 저 개천 숙엘 들어가?"라고 내뱉은

소년의 독백은 아낙들이 돈 내고 빨래할 수밖에 없던 까닭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진이 시대의 진상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