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演藝·畵報·스포츠

[이건희칼럼] 한국영화 100년과 '기생충'

바람아님 2019. 11. 13. 08:51
머니S 2019.11.13. 07:04
지난 5월28일 용산 CGV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영화 <기생충> 주연배우들. /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미국 메이저 5대 영화사의 세계 영화시장 점유율은 70~80%에 이른다. 할리우드영화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자국영화 시장점유율(2017년 기준)이 압도적인 국가는 인도(93%)밖에 없다. 인도는 영화의 메카를 발리우드라 부르며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자국영화를 국민 최고의 오락거리로 여긴다.


그 외에 자국영화가 상대적 강세인 국가는 일본(55%), 중국(54%), 한국(52%)이다. 중국은 서구의 시장경제 체제와 다르게 정부주도 시스템으로 외국영화 수입을 통제하므로 자국영화 점유율이 높다. 프랑스(37%), 영국(37%), 독일(24%)은 50%가 안된다. 선진국에 비해 경제력이 크게 미약했던 한국은 힘든 시절을 지나면서도 영화인들의 열정과 노력에 의해 자국영화 점유율이 일본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한국영화사, 단성사에 뿌리 내려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는 100년 전인 1919년 10월27일 서울 종로3가의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주인공 송산(마쓰야마)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는데 계모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간계를 꾸민다. 재산이 바닥나고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자 송산이 눈물을 머금고 의형제들과 함께 복수에 나서는 권선징악적 이야기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영화관으로 1907년에 문을 연 단성사는 오랜 세월 한국 영화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다. 1993년에는 <서편제>를 194일 동안 상영해 개봉관 최장 상영기록을 세운 바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2001년 9월 옛 건물을 철거하고 2005년 2월에 7개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재개관했다. 이듬해 9월에 총 10관, 1806석을 갖춘 극장으로 규모를 더 키웠지만 결국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대형 영화관 체인에 밀리며 경영악화로 부도가 났다.


그 뒤 리모델링, 법원경매, 주얼리도소매센터로 변신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올 10월23일 영화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한국영화의 출발지이자 상징으로서 옛날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한국영화 100년 역사를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1420여㎡(2430평) 규모의 영화역사관에는 영화 관련 자료 8만여점이 전시돼 있으며 영화배우, 스태프, 촬영감독 등 인물을 다룬 메모리얼관도 있다.


1919년에 <의리적 구토>를 제작한 박승필은 개봉 당시 다음과 같이 신문에 광고를 했다. “경성에서 촬영된 대연쇄극.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000원의 거액을 내어, 27일부터 단성사에서 봉절개연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 제씨들은 한번 보실 만한 것이다.” 감독, 각본 및 주연은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맡았고 촬영 및 영화기술 인력은 국내에 없어서 일본에서 조달했다.


설렁탕이 10전, 연극관람표가 40전이던 시절에 특등석 1원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으로 관람료가 상당히 비쌌다. 그럼에도 관람객은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숫자인 10만명으로 대박을 기록했다. ‘매일신보’는 “쵸저녁부터 도쇼갓치 밀니는 관객남녀는 삽시간에 아래위층을 물론하고 빡빡히 차셔 만원의 패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한 대셩황이 잇더라”고 보도했다.


◆무성-발성-컬러-에로영화로 발전

1926년에 나운규가 각본·감독을 맡은 35㎜ 무성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적 저항의식이 들어있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관객들이 목 놓아 울면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화면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현존 극영화는 <청춘십자로>(안종화 감독, 1934년)다. 일제강점기 어두운 현실 속에서 허덕이는 청춘의 애정과 갈등을 그린 통속 오락극으로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베스트10’의 하나로 선정됐다.


무성영화 시대에서 발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개봉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 1935년)은 대사가 몇마디에 불과하고 다듬이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가 나는 것에도 신기해하며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 관람료는 무성영화의 갑절로 뛰었지만 단성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관객을 울리고 웃기며 영화배우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던 변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는 <여성일기>(1949년)로 당시 25세인 홍성기 감독이 당대 기술인력을 결집해 만들었다. 사랑의 길을 포기하고 고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간 한국보육원 설립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연극·영화계 대모, 국민 어머니로 불렸던 황정순이 주인공을 연기했다. 홍성기 감독은 한국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던 여배우 김지미씨와 결혼했으나 이혼한다.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는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 1954년)이다. 주인공 남녀(이향·윤인자) 키스신이 장안의 화제를 모아 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키스신을 연기해야 하는 여주인공을 섭외하기 힘들어 제작자가 가족을 설득해 주겠다고 약속해 겨우 윤인자씨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윤인자씨가 정조를 내놓았다며 대중이 비난하고 윤인자씨 남편은 감독을 고소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줄거리는 북한 공작원 여성과 남한 장교가 서로 신분을 속인 채 사랑에 빠진 뒤 신분이 드러나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것으로 유튜브에서 영화 전체를 찾아볼 수 있다.

지난달 23일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단성사 영화역사관이 개관했다 / 사진=뉴시스 조수정 기자
농도 짙은 장면이 나오는 최초의 성인영화는 <애마부인>(정인엽 감독, 1982년)이다. 폭발적 인기로 31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속편들이 이어지며 1996년에는 13번째 애마부인이 나와 가장 많은 편수가 제작된 한국영화 시리즈물로 기록됐다.


1편 줄거리는 30대 초반의 가정주부 애마 오수비(안소영)가 집에 잘 안 들어오는 남편(임동진)에게 화가 나서 친구집에서 외박을 하고 이 때문에 남편은 아내와 심하게 다투고 술집에서 술 마시다가 과실치사로 감옥에 들어간다. 수비는 남편 면회를 가다가 기차 안에서 만난 도예하는 청년의 순수함에 진실한 사랑을 느끼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옛 애인과 정사를 나누는 불륜을 저지르지만 결국엔 출옥한 남편에게 돌아간다.


애마부인 시리즈의 성공으로 유사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에로물 전성시대가 열렸다. 1995년에 처음 제작된 <젖소부인 바람났네>도 대성공을 거두며 시리즈물로 이어졌으며 비디오용으로 제작된 16㎜ 에로영화가 비디오 대여점에서 큰 인기를 끄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부인 ○○했네’라는 제목의 아류작이 많이 만들어졌다.


◆관객 1000만시대 열며 예술성도 높아져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은 <서편제>(임권택 감독, 1993년)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록으로 이어졌으며 10년 뒤에는 <실미도>(강우석 감독, 2003년)가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금까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명량>(1762만명, 2014년), <극한직업>(1626만명, 2019년), <신과함께-죄와 벌>(1441만명, 2017년), <국제시장>(1426만명, 2014년) 등 총 19편에 이른다.


예술적 수준도 높아지면서 1961년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마부>(강대진 감독)가 특별은곰상을 받았으며 <피에타>(김기덕 감독, 2012년)가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기생충>(봉준호 감독, 2019년)이 프랑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다만 미국에서 거행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한국 영화인이 수상한 적이 없다.


반면에 일본영화는 1950년대 초반부터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 시작해 수상횟수가 27회(특별상포함)에 달한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은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세계 명작 반열에 들어가는 <라쇼몽>(1952년)을 비롯해 <지옥문>(1955년), <사무라이 무사시의 전설>(1956년), <굿'바이>(Good & Bye; 2009년) 등 여러 작품이 수상했다. 의상상은 <지옥문>(1955년), <란>(1986년), <드라큐라>(1993년), 여우조연상은 <사요나라>(1958년), 음악상은 <마지막 황제>(1988년)가 수상했다. 단편다큐멘터리상, 단편영화작품상, 장편애니메이션작품상, 단편애니메이션작품상 등 아카데미상 여러 분야에서 수상을 기록했다.


한국영화는 2018년에야 <버닝>(이창동 감독)이 처음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1차 후보에 포함됐는데 최종 후보 5개 작품에는 들지 못했다. 올해 출품한 <기생충>이 또다시 아카데미상 수상에 도전하고 있다. 내년 초에 수상 소식이 날아오면서 한국영화 역사 100년에 새로운 도약을 하는 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영화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지난달 14일 제25차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창작자 중심의 새롭고 다양한 한국영화, 영화산업 지속성장 기반 강화, 일상 속 영화향유 문화 확산을 3대 핵심전략으로 하는 ‘한국영화산업발전계획’을 발표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8호(2019년 11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건희 재테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