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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시사철] '타짜' 아귀는 손 하나를 걸었다… 그렇다면 유시민은?

바람아님 2020. 1. 12. 10:54

(조선일보 2020.01.11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조국 궤변'과 영미 분석철학

'타짜' 아귀는 손 하나를 걸었다… 그렇다면 유시민은?                        


일러스트= 김영석
일러스트= 김영석


영화 '타짜'의 하이라이트.

주인공 고니(조승우)는 스승 평경장(백윤식)의 맞수였던 아귀(김윤석)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다.

항구에 세워놓은 배 안에 마련된 도박판에서 고니는 패를 돌린다.

"아귀한테는 밑에서 한 장, 정마담(김혜수)도 밑에서 한 장, 나 한 장. 아귀한텐 다시 밑에서 한 장,

이제 정마담에게 마지막 한 장." 이 시점에 아귀의 입에서 그 유명한, 타짜의 수많은 명대사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대사가 나온다.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아귀의 주장은 이렇다. 고니는 아귀가 9땡을 갖도록 패를 돌리면서, 동시에 정마담의 손에 장땡을 쥐여주려 한다.

아귀가 모든 것을 걸고 잃게 하려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고니는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XX가"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새로운 도박을 제안한다.

"이 패가 단풍이 아니라는 거에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아귀는 그 승부를 받아들이는데, 다들 알다시피 그 패는 까보니 사쿠라였다.

이렇게 아귀는 모든 것을 잃고 해머에 손이 찍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철학과 시사를 논하는 지면에 갑자기 웬 도박 타령인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바로 '타짜'의 이 장면과 깊숙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귀가 주장하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고니는 아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정마담에게 장땡을 주었다.'

그러한 주장은 문제의 패가 장이라는 사실(fact)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고니는 어떻게든 아귀를 이기려고 하며, 필요하다면 언제건 '구라'를 칠 것이고,

자신에게 9땡이라는 대단히 높은 끗수를 안겨준 지금이 고니의 승부수일 것이라는

다양한 정황을 종합한 결과물이다.


아귀의 주장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체계 속에서 정합성(coherence)을 지닌다. 이른바 '진리 정합설'이다.

반면 정합설에 입각한 아귀의 주장에 반박하고자

고니는 아귀의 주장이 사실과 대응(correspond)하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한다.

'진리 대응설'에 입각해, 어떤 판단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확인함으로써 진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두루 받아들여지는 학설이기도 하다.


현대 분석철학에서 진리론은 대응설정합설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실용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실용설, 후기구조주의 등과 맥락을 같이하는 합의설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나, 결국 핵심은 대응설정합설의 갈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치 고니가 아귀를 이겼던 것처럼 대응설이 정합설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래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가령 '빛은 직진한다'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인슈타인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진리다. 언제건 어떤 식으로건 빛을 관찰하면 직진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뉴턴이 만든 고전물리학 이론에도 부합했다. 대응설과 정합설 모두를 충족시키는 진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 또한 중력에 따라 휜다.

이 주장은 당시까지 사실에 대응하지는 않지만 그 정합성이 너무도 탁월했다.

결국 1919년, 3·1 운동이 벌어진 그해,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아프리카 인근의 프린시페 섬에서

개기일식과 주변의 별을 관측하여 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패를 까보니 아인슈타인이라는 타짜의 말대로 단풍이 나온 셈이다.


물론 대응설과 정합설의 논쟁을 이렇게만 요약할 수는 없다.

현대 영미 분석철학이 대체로 그렇듯 이 또한 극도로 복잡한 논쟁으로 뒤덮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진리에 대한 이론 중 굵직한 것이 둘 있다는 것,

대체로 대응설이 옳을 때가 많지만 때로는 정합설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를 현혹하는 온갖 궤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령 조국·정경심 부부의 딸 조민이 받았다는 표창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진리는 명백하다.

그 표창장 파일은 위조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위조가 아니라면 정식으로 발급된 표창장 원본을 제시하면 된다.

한마디로 '패를 까보면' 된다. 하지만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위해 제출했던 표창장 파일은, 가짜라는 의미의 속된 표현 그대로,

'사쿠라'였으니 말이다.


조민이 받은 표창장이 정본이라는 주장은 대응설뿐 아니라 정합설의 관점에서도 진리라고 볼 수 없다.

해당 표창장의 발급 근거가 되는 봉사활동 프로그램 자체가 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민이 받은 표창장이 정본이라는 말은, 극소수를 제외한 동양대학교 관계자 모두의 인식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기존의 진리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정합설에 입각해보더라도 이런 명제는 참이라고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유시민, 김어준 등 소위 '친문 스피커'들이 조국 관련 사안에서 끌어들이는 논리가 갈수록 궤변으로 치닫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아는 한 그 어떤 진리 이론으로도 옹호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꾸 '기레기'가 어쩌고 '검찰 개혁의 불가피성'이 저쩌고 하는,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지지자들에게나 설득력을 가질 법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가 아닌 온라인 군중의 함성과 폭력을 동원해가며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우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타짜'에 나온 저 도박판보다 나은가?

저 노름꾼들은 적어도 승부에서 지면 가진 돈 전부와 손모가지를 내놓을 정도의 당당한 결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귀의 부하는 내기에서 진 형님의 손에 해머를 내려찍는다.

패자는 군말 없이 승복하는 것, 그것이 도박판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와 언론을 노름판에 비교할 수야 없다.

하지만 적어도 '타짜'만도 못한 '사짜'들이 설치는 곳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진리는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야 하며 올바른 이론과 관점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새해, 2020년 경자년은, 거짓이 몰락하고 진실이 승리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