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양상훈 칼럼] 윤 일병 사건의 근본 원인

바람아님 2014. 8. 7. 10:50

(출처-조선일보 2014.08.07 양상훈 논설주간)

국방을 남에게 의존하며 위기의식,절박감,사명감 사라져버린 군대
거기에 기강을 세우는 건 모래 위에 집 짓기… 만약 지금 전쟁이 난다면?

양상훈 논설주간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 얘기를 하려 한다. 
윤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이루 말로 다 못할 가혹 행위를 당하다 사망한 사건의 뿌리에 대한 내용이다.
수십년 고질병인 병영 악습이 뿌리라고도 하고, 만연한 학교 폭력이 군대로 이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정도로 민주화되고 인권 의식이 높아진 나라의 병영에서 이런 일들이 
여전히 횡행하는 것에는 더 근본적인 바탕이 있다고 생각한다.

10여년 전 이스라엘의 방위산업 관련 기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엔 현역 장교들도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과 가볍게 얘기를 나누다 고참병에게 얻어맞고 당하는 군 생활이 화제가 됐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 말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따로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으냐"고 물어 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런 군대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또 물었다. 
이번엔 필자가 그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군인은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우리가 물러서면 내 가족이 죽는다"고 했다. 
''물러설 곳이 없는 군대여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형제·자매인데 어떻게 폭행이 계속되느냐, 
한국도 우리와 같은 처지 아니냐'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우리는 처지가 다르지 않은데 왜 군 문화는 다른가를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이스라엘도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와 이스라엘의 차이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이스라엘의 군대에는 절박함이 있다. 우리 군에는 그런 절박함이 없다. 
전쟁은 절대 나지 않을 것이고, 설사 나더라도 미군만 있으면 괜찮다는 믿음이 은연중에 모두의 마음속에 깔려 있다. 
군의 중추인 장군들의 몸속부터 국방 의존증의 피가 흐르고 있다. 
미군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제일 먼저 무너질 사람들이 이 장군들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미동맹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미국에 생존을 의존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것이 '활용'이다.

위기의식과 절박감이 없는 군에 기강을 세운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저 후임병이 유사시 내 생명을 지켜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떤 선임병도 가혹 행위를 할 수 없다. 
'우리밖에 없다. 물러설 곳도 없다'는 절실한 생각이 없는 군의 내무반은 전사(戰士)들의 휴식처가 아니다. 
서로 피까지 나누겠다는 전우애가 충만할 리도 없다. 
이스라엘 청년들처럼 서로 어깨를 겯고 '죽어도 물러서지 않으리'를 맹세해 본 적도 없다. 
기강과 전우애가 빠진 내무반은 사적인 폭력이 난무할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춰진 은폐 공간일 뿐이다. 
리더십과 임무 수행 능력이 앞선 병사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수를 내세워 깡패짓을 일삼는 작은 악마들이 
더 활개친다.

병사들을 관리해야 할 사람은 초급 장교와 부사관이다. 
이스라엘에선 가장 뛰어난 병사를 선발해 초급 간부로 교육한다. 간부로 뽑히면 가족의 영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초급 장교와 부사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충원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다.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고 정치인들이 군 복무 기간을 놀랄 정도로 줄였다. 그러자 장교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 
경찰관 시험은 '수백 대 1' 인데 같은 급수인 군 부사관 시험은 사실상 미달이다. 
'우리밖에 우리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절박감이 있는 나라에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초급 장교와 부사관들이 병사들과 함께 뒹굴면서 전우로, 동생으로 보살필 것이라고 믿는다면 망상일 뿐이다. 
총소리 났다고 그대로 도망친 GOP 소대장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나라 지키는 일이 제 일인지 남의 일인지 애매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윤 일병 사건 후 많은 분이 '지금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물음을 떠올려 본 것 같다. 
군 출신 원로 한 분은 비분을 섞어 "우리 군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너무 심한 말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한 안보 상황은 이스라엘보다 더 심각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 군의 실질 전투력은 이스라엘군에 비해 어떤 수준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지난 60여년간 미국의 보호막 아래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이 생존 전략과 발전 전략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그러나 최소한 나라를 지키는 일만은 남이 아니라 내가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한다. 
제 집 지키는 일을 옆집 남자에게 맡긴 가정에선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분단국가의 군대이면서도 이토록 기강이 해이한 것도 그런 부작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