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선우정의 글로벌 터치] '용서'와 '기억'

바람아님 2014. 9. 13. 09:15

(출처-조선일보 2014.09.13 선우정 국제부장)

日에 8년 동안 짓밟혀도… 中, 전쟁 賠償 청구 대신 "일본, 책임을 痛感하고 깊이 반성" 문구 관철
'용서하되 잊지 말자'는 전후 질서의 산물 때문
동북아 질서 해체하면 비극 되풀이될 수 있어

선우정 국제부장중국이 일본과 국교(國交)를 재개한 것은 1972년이었다. 
이때 양국 총리가 서명한 공동성명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를 담고 있다. 
"중국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賠償)의 청구를 방기(放棄)한다"는 5항이다. 
일본과 경제협력 협정을 별도로 맺은 것도 아니다.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 중원(中原) 침략을 시작한 것은 1937년이었다. 
1945년까지 8년 동안 중국의 넓은 국토와 많은 인명(人命)이 일본에 짓밟혔다. 
4년 전쟁의 대가로 1956년 일본이 필리핀에 지불한 배상금이 5억5000만달러였으니 중국은 이보다 
몇 배 많은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발언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일본 인민도 우리 인민처럼 군국(軍國)주의자에게 희생된 피해자다.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면 결국 같은 피해자인 일본 인민이 (배상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인민을 문화대혁명의 피바다에 몰아넣고 있던 공산당 정권의 발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관대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총리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강경하게 뜻을 관철한 문구(文句)가 
"일본은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안겨준 데 대한 책임을 통감(痛感)하고 깊이 반성한다"는 
공동성명 전문(前文)이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는 당초 
"중국 국민에 대해 많은 폐(迷惑·메이와쿠)를 끼친 것에 대해 깊은 반성을 표한다"는 문구를 제시했다. 
이 말을 들은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에선 실수로 여성의 치마에 물을 튀겼을 때 '폐를 끼쳤다(添了麻煩·톈러마판)'고 말한다. 
침략 전쟁으로 수백만명을 희생시켰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중·일 외교사에 기록된 유명한 '메이와쿠(迷惑) 사건'이다. 
중국은 배상권을 포기하는 대신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고 관철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이런 태도는 이전 중국을 지배했던 국민당을 계승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에서 발표한 승전(勝戰) 메시지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이다. 중국의 관대한 태도는 B·C급 전범 처리에서도 나타났다. 
중국 국민당의 전범 사형은 149건으로, 영국(223건)·네덜란드(236건)보다 적었고 미국(143건)과 비슷했다. 
중국 공산당은 전범을 한 명도 형장에 세우지 않았다.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빠른 1951년 일본에 대한 배상권을 포기했다.

현대 '전후(戰後)'의 기점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이다. 
하지만 동북아에서 전후 질서가 구축된 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었다. 
이 조약 14조는 승전국의 배상권 한도를 '(일본이) 존립 가능한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로 규정했다.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에 대한 과도한 배상 요구가 결과적으로 2차 대전을 유도했다는 반성에서 나온 조항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미국·영국 등 주요 연합국이 대일(對日) 배상권을 포기했다. 
일본은 그 덕분에 경제적 책임을 모면하고 전후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1972년 중·일 공동성명 역시 '용서하되[배상권 포기] 잊지 말자[과거사 반성]'는 전후 질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년 동북아는 '전후 70주년'을 맞는다. 
이전 60주년과 다른 것은 동북아 안보의 기둥인 중·일 양국이 '용서'와 '기억'을 동시에 해체하려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질서와 공동의 비전 없이 전후 질서를 해체한 동북아는 전전(戰前)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 있다. 
용서의 전제는 물론 기억이다. 
질서의 복원을 위해 먼저 기억의 복원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