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영대기관첩』 중 「영대빙희(瀛臺氷戱)」, 1784, 지본수묵, 23.3×54.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금까지 보아온 산수화와는 다릅니다. 사방을 둘러가며 건물과 담장 그리고 아치형 다리가 보입니다. 아치형 다리 바깥쪽의 탑은 종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복발형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림은 이국의 한 풍경을 그린 듯합니다.
화면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어 호수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안쪽에도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홍살문 주변에는 화살을 쏘는 사람들 모습도 보이는데 등에 깃발을 꽂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무리도 그려져 있습니다.
짐작하기 쉽지 않은 이 그림은 베이징 자금성 서쪽의 인공호수인 남해 안쪽에 있는 영대에서 열린 빙희연(氷戱宴)을 묘사한 것입니다. 빙희연은 청나라 황실에서 여는 겨울철 행사 중 하나입니다. 매년 12월 황제의 참석 아래 영대에서 청나라 팔기(八旗) 소속 병사들이 스케이트를 타면서 활을 쏘던 무예 시범을 가리킵니다. 주로 겨울철에 청에 파견되는 조선 사절에게 얼음 위에 펼쳐지는 이 빙희연 이벤트는 매우 신기한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화원이 아닙니다. 당시 정사(正使) 바로 아래의 부사 직함으로 베이징에 갔던 강세황(姜世晃·1713∼91)입니다. 강세황은 18세기 들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던 조선 미술계에 겸재 정선과 함께 양대 중심축을 이루었던 인물입니다. 정선이 중국 산수화와 다른 진경산수화를 창안해냈다면 그는 보다 중국 취향 쪽이었습니다.
당색으로 보면 그는 정권에서 밀려난 소북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새로운 문물 유입에 적극적인 남인들과 가까웠습니다. 18세기 들어 청은 여진족이 세운 과거의 후금(後金)이 이미 아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경제부국이자 세계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한 연구를 보면 18세기에는 전세계 GDP의 40% 가량을 당시 청이 차지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문화도 국제적인 양상을 띠었습니다. 청나라 황실에는 이탈리아인 선교사이자 화가인 낭세녕이 활동하고 있었고 베이징 시내의 천주교회에서는 가톨릭 집례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강세황은 이런 중국을 무척 가보고파 했습니다. 늘 중국을 동경했던 그는 1778년 29살의 나이로 중국사신으로 가는 박제가(1750∼1805)에게 송별시를 써주며 ‘내 평생의 한은 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인데(…)이제 백발이 성성하게 됐으니 오로지 겨드랑이에 날개 돋는 것만 바랄 뿐이다’라는 시를 읊었을 정도입니다.
그랬던 그가 66살에 중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많은 사람이 보았지만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빙희연을 실제 보고 그렸습니다. 강세황이 귀국 후에 이 빙희연에 대해 정조에게 자세히 설명한 내용이 왕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12월 21일 황제가 영대에서 빙희를 구경했습니다(…) 얼마 뒤에 황제가 얼음 썰매를 탔는데 용처럼 만든 배로 좌우에서 끌고 갔습니다. 얼음 위에는 홍살문이 놓였고 그 위에 붉은 표적이 달려 있었습니다. 팔기 병사들이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색색의 옷을 입고 신발 바닥에 나무 조각과 쇠 날을 달아 타고 달리면서 무릎을 꿇고 활을 쏘아 이 표적을 맞추는데 마치 우리나라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짚 표적을 맞추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중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강세황은 18세기 조선에 중국에서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문인화풍을 적극 소개한 대표적 문인화가입니다. 중국에서 문인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입니다. 이후 원·명을 거치면서 그림은 문인들이 갖춰야할 또 다른 교양의 하나라는 시각이 생겨날 정도로 보편화됐습니다. 당시 중국 문인들이 그린 그림 스타일은 어느 한두 화풍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동기창이 나와 역대 유명한 문인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문인화의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이에 대해 포괄적인 용어로 남종화(南宗畵)란 타이틀을 붙였습니다. 남종화는 따라서 개별적인 화풍보다는 먹을 가지고 문인들이 마음속 뜻을 그린 그림을 가리킵니다.
굳이 화풍 상의 특징을 찾자면 송나라 미불이 창시한 미법 산수, 원나라 문인화가인 예찬이나 황공망이 그린 물가 구도와 피마준법의 산 표현 그리고 명나라 중기의 심주, 문징명 등의 문인화가들이 보인 맑고 담백한 필치 등이 주요한 표현입니다.
남종화의 이런 문인화풍은 중기의 끝이자 후기의 첫 부분에 위치한 윤두서가 본격적으로 시도를 했습니다. 같은 시기의 겸재 정선도 이와 같은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강세황은 이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비평가로서 주변 화가들의 그림에 직접 평을 하면서 남종문인화가 조선 후기에 정착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강세황이 이 그림에서 보여준 중국 문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결국 그로 하여금 남종화 전파의 기수가 되게 한 사실을 또 다른 측면에서 말해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 속 도장 가운데 오른쪽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신에 모두 기로소에 든 영광을 뜻하는 ‘삼세기영(三世耆英)’이며 왼쪽 인장은 자신의 자인 ‘광지(光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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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1713∼92)
조선후기의 문인화가로 예원의 총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자는 광지(光之)이며 호는 중년 이전까지는 첨재(添齋), 이후에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을 썼습니다. 한성부판윤까지 지낸 부친 강현의 실각과 형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벼슬길을 포기하고 30대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낙향해 그곳에서 성호 이익과 주변의 남인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61살에 영조의 호의로 첫 관직에 나가 사헌부 감찰, 한성 판관 등을 거친 후 66살 때 건륭제의 천수연 참석을 위한 연행 부사로 참가해 이 ‘영대빙희’를 그렸습니다. 이후 도총과,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습니다. 제자로는 김홍도(1745∼1806)와 신위(1769∼1845)가 있으며 막내아들 신의 둘째 아들인 강이오(姜彛五·1788∼?)가 매화와 산수를 잘 그린 문인화가로 이름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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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