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사설] 르윈스키가 말하는 '온정적 인터넷'에 주목한다

바람아님 2015. 3. 22. 10:02

[중앙일보] 입력 2015.03.21

 

미국 백악관의 전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그제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TED 콘퍼런스에 강연자로 나선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1998년 그를 탄핵 위기로 몰고 갔던 ‘르윈스키 스캔들’의 장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 세계 지식인이 모여 창조적·지적 아이디어를 토론하는 현장에서 르윈스키가 인터넷 폭력에 맞서는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이버 폭력의 폐해’라는 강연에서 부적절한 스캔들 자체보다는 익명의 비난, 인격 모독 등 개인적인 경험에 초점을 맞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자신이 “인터넷으로 평판이 완전히 파괴된 첫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직·간접적으로 인터넷 폐해를 겪고 있는데 하물며 세계적인 성추문의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다.

 98년 르윈스키 스캔들을 밝혀낸 특검 검사 케네스 스타가 사건 전모를 담아 펴낸 ‘스타 보고서’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관음증’ 대상이 됐다. 이 때문에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는 효과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진실보다 말초적인 스캔들에 집중하고, 사생활 보호보다 익명성 뒤에 숨어 인격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사이버 디스토피아’가 되는 계기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르윈스키의 말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망신 주기가 하나의 산업이 됐으며, 클릭 수는 곧 돈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생산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인터넷을 이런 아수라장으로 방치해선 곤란하다.

 우리는 르윈스키가 대안으로 내놓은 ‘온정적인 인터넷 사회’에 주목한다. 인터넷 이용자들이 남을 더 배려하고, 개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글·사진을 마구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인터넷을 더욱 따뜻하고 인간적인 공간으로 가꾸는 일은 우리 모두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가 ‘인간 배려’의 인터넷을 만들기 위한 지혜를 모을 때다.

"난 사이버 폭력 첫 희생자 … 망신주기, 하나의 산업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5.03.21

클린턴과 스캔들 후 경험 토로
"악성 댓글에 죽을 생각까지
클릭 수가 곧 돈으로 이어져"
'온정적 인터넷' 대안 제시
18분 강연 뒤 청중 기립 박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모니카 르윈스키가 19일 TED 콘퍼런스에서 사이버 폭력의 문제점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사진 TED]

 

50대 초반의 대통령과 혼외정사를 가졌던 20대 초반의 백악관 인턴은 10년 넘게 대중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다. 온라인으로 쏟아지는 온갖 조롱과 손가락질, 비난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담을 쌓았던 그가 ‘세계인의 지식축제’ TED 콘퍼런스에 등장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1996~98년 빌 클린턴(69) 전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전 세계적 이목을 끌었던 모니카 르윈스키(41)가 19일(현지시간) ‘TED 2015’ 연사로 나섰다. 2006년 런던정경대에서 사회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그는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포브스 주최 강연회에 나타났고, 올해 TED 콘퍼런스에 등장하면서 르윈스키는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가’ 활동을 시작했다.

 연단에 선 르윈스키는 1m65㎝ 정도 키에 예전 TV 화면에 비춰졌을 때보다 여위어 보였다. 르윈스키는 ‘사이버 폭력(cyber bulling)’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그는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로맨스’ 이후 악성 댓글과 소문, 뉴스에 시달려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다”며 “잠을 잘 때 어머니가 항상 곁에 있었고 샤워를 할 때는 항상 문을 열어둬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검은색 모자를 쓰고 클린턴 전 대통령과 포옹하는 자신의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고, 대통령과의 정사 내용을 소재로 한 농담이 e메일로 오갔던 사실도 담담히 얘기했다. 그는 자신을 “사이버 폭력으로 파괴된 첫 희생자(patient zero)”라고 표현했다.

검은색 모자를 쓴 르윈스키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강연 내내 르윈스키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이버 마녀사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는 “망신주기(to shame)는 하나의 산업이 됐고, 조롱은 상품으로 거래됐다”면서 “클릭 수는 곧 돈으로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됐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르윈스키는 지난해 애플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에 대한 해킹으로 사생활이 고스란히 노출된 여배우 제니퍼 로런스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르윈스키가 내놓은 대안은 ‘온정적인 인터넷(compassionate internet)’이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남을 더 배려하고, 미디어 종사자들도 막무가내 식으로 기사를 올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강연을 마치며 그는 대중 곁으로 돌아온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이제는 남들로부터 제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 부끄러웠던 과거를 말할 시간이기 때문이죠. 저처럼 사이버 폭력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요, 저처럼.”

르윈스키의 18분 강연이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고, 르윈스키 스캔들 여파로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석패했던 앨 고어도 그중 하나였다.

밴쿠버(캐나다)=김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