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5-5-25
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어능력시험에 도전하세요. 밑져야 본전이니까”라고 했더니 이 학생은 ‘미쳐야 본전’이라고 알아듣는다. “미치도록 뭔가에 빠지면 본전은 건진다는 얘기죠?” 밑지지(손해 보지) 않으려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볼 때마다 그 젊은이의 창의적 경청에 감탄하게 된다.
미치겠다는 사람이 주변에서 늘고 있다. 미쳐야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돌아버릴 지경이라는 하소연이다. 이 와중에 뜬금없을지 모르겠다. “미칠 대상이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요?” 실은 무엇에 미쳤느냐가 중요하다. ‘매드 맥스’의 감독은 영화에 미친 자다. 사랑에 미친 자들은 유행가도 점령한다. “너는 내 여자니까/ 네게 미쳤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난 행복하니까.”(싸이 작사·작곡 ‘내 여자라니까’ 중에서)
성공한 연예인들의 인터뷰 단골 메뉴. “미친놈 소리 많이 들었죠.” 어디 연예계뿐이랴. 어떤 분야건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 치고 미쳤다는 얘기 안 듣고 그 자리까지 온 사람은 드물 거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에 미치고, 사랑에 미친 게 아니라 엉뚱한 것(유한한 권력)에 정신 줄을 놓은, 그야말로 ‘돌아버린’ 자들이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미친 자들은 대체로 말이 많다. 그것도 함부로 한다.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게 미친 자들의 특기다. 반대로 남을 위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을 향한 생각이 남을 향한 말보다 길고 그윽하면 거기서 향기가 난다. 자비로운 부처님껜 죄송하지만 이 미쳐 가는 세상에 살아남아서 희망을 되살리려면 일단은 미친 척해야 하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든다. 그렇게라도 해서 가까스로 정상 부근에 미친(도달한) 후에 ‘사실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고백하면 사람들은 믿어줄까? 오늘 밤 ‘비정상회담’에 안건으로 올리고 싶다. “세상을 정상으로 만들고 싶어서 비정상이 되어 가는 나. 정상인가요?”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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